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고 남들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신이 어쩌구,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어쩌구 하는데. 나는 파이의 권태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리차드 파커(호랑이)와 싸울 땐 삶의 의미나 목표에 대해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로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에만 몸을 맡기면 되지만, 그 나머지 시간들-끝없이 이어지는 제한된 일상의 참을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에 대해.
나는 요새 무척이나 지루하다, 삶이.
복닥복닥 뒤처리에 지칠 아기도 없고, 도저히 먹고살기 힘들다고 욕할 회사도 없고, 그렇다고 남는 시간을 찬란한 취미생활에 보낼 만한 돈도 없다. 그래, 남편은 있다. 어쩌면 이 '남편'이란 존재가 내가 유순하게 권태로움 속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원천인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엔 억지로라도 즐겁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이젠 '억지로' 하는 데 들어가는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두렵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 멍한 눈빛을 한 파이를 보며, 때론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삶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이 끝없는 권태도 사라질 거야. 신기루 같은 희망.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나태하게 보낸 죄, 달게 받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