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가 저자다


지난 번에 페이퍼에 썼던, 담배를 엄청 태워가며 쓴 에너지협동조합연합회의 홍보 소책자가 나왔다. 책자를 딱 보는 순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예전부터 이렇게 쉽게 쓴, 대중적인 홍보 책자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다. 구성은 내가 평소 강의하는 순서로 잡았다. 나는 늘 글을 쓰던, 강의를 하던 쉽게 풀어 설명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쓰는 것이 목표였다. 바쁜 상황이었고, 도무지 짬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쓰겠다고 했던 건, 이런 거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기회도 좋았다. 프로젝트로 홍보물을 만들 돈이 있었고, 실력있는 디자이너가 있었다.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믿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연합회 사무실에서 실물을 딱 처음 보는데, 와! 완전 색감이 예뻐서 만족스러웠다. 편집자로서 그리고 공동저자로서 책을 여러권 내봤지만, 이 소책자만큼 만족감을 준 적은 없었다. 완전 기분 좋았다. 홍보 담당자로서 나에게 원고 독촉을 하다가 "오늘 안 주시면 저 울어버릴거예요" 라고 협박까지 했던 여성 활동가가 나에게 저자 싸인을 해달라고 네임펜을 갖고 왔다. 무슨 책도 아닌데, 저자냐구. 시끄럽다고 무시했건만, 이 친구 내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싸인해 줄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 몇 쪽 되지도 않는 책자를 보고 또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내가 도무지 싸인을 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 친구가 자꾸 내 칭찬을 한다. 평소 옷차림이나 외모에 대한 지적질을 당했던 처지라 칭찬을 해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못 이기는 척 해줄수도 있지만, 난 엄청난 악필이고, 내가 글씨를 쓰는 순간 또 뭔가 지적질을 하며 놀림을 당할 게 뻔했다.


결국 옆에서 보고 있던 처장님이 이 친구를 밀어내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저 자가 저자다. 싸인을 받고야 말겠다." 이러는 거다. 무슨 젊은 여성이 아재 개그를 다 하냐? 외부 일정 때문에 몇 부만 챙겨서 일어서는데, "살이 찌셨나? 아님 부으신건가?" 이런다. 평소 이 친구에게 옷과 외모에 대한 지적 혹은 놀림을 많이 당했던 터라 그냥 무시했다. 어쨌거나 난 소책자가 예쁘게 나와서 무척 기분이 좋았고,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던 별로 상관이 없었다. 


마침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창립 7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열어, 이쪽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거기서 친한 연구원에게 소책자를 보여줬더니 좋아했다. 그리고 그날 만난 여러 사람에 보여줬더니 쉽게 잘 썼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아, 나 칭찬을 받으면 완전 우쭐해지는 인간이라. 그렇지. 내가 좀 잘났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 하는 사람이야. 막 이런 생각하면서 혼자 완전 들떠 있었다.


열심히 많이 뿌려야지. 그래서 얼른 다 소진하고 또 찍어야지. 그땐 주위 사람들에게 냉정한 의견을 듣고 반영해서 더 잘 만들어야지. 기분이 너무 좋다!


기대고 싶은 사람


최근 몇 달 동안 힘든 일이 많았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은 술 밖에 없었고, 술은 잠시 그 모든 문제를 잊게 해줬지만, 술이 깨고 나면 그 모든 문제는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었다. 힘들었다. 괜히 나를 원망했다. 나라는 인간, 왜 이렇게 멍청하고 바보같고 못난 걸까? 남들은 이 나이에 버젓이 잘들 살던데, 난 뭐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이렇게 살고 있나! 운동을 20년을 넘게 했는데, 뭐 하나 이룬 것도 없이 이러고 살고 있나!


스스로 이렇게 힘든데, 자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고 의지하려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어 몇 십분씩 통화를 하면서 어려운 점을 이야기한다.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하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난 그 사람이 아니니까. 


어떤 이는 오래전 업무 때문에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당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욕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다. 얼마나 욕을 하고 다녔는지, 친하게 지냈던 조금 멀리 살던 사람이 날 만나면 내 걱정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막 묻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몰아내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 그들에게 나는 공적이었다. 살면서 참 적을 많이 만들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요즘은 또 나에게 엄청 잘 대해준다. 그러면서 나에게 약간 기대는 느낌이 든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한테 전화를 걸고, 뭔가 본인이 잘 모르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나를 찾는다.


그래. 오래전부터 나는 늘 후배들, 특히 여성 후배들에게 좋은 상담자였다. 잘 들어주고, 섯불리 조언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잘 들여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험상 이렇게 해보면 조금 나아질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비록 성별은 달랐지만, 난 예민한 성격이었고, 내가 겪었던 불편함과 어려움을 그들도 그대로 겪고 있었다. 에전엔 유난히 여성 후배들이 날 많이 찾았건만, 요즘은 여성 선배들조차 그런다. 


하지만 실은 나는 늘 내 삶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한심한 처지다. 지금의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 처지가 나아질 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발 지금 말고 좀 나중에 기대면 안 될까? 내 앞가림이라도 좀 제대로 하게 되면, 그땐 더 열심히 들어줄게. 뭔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게. 그러면 안 될까?


한 숨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주 한 숨을 내쉬는 버릇이 생겼다. 몇 해 전 출판사에서 일할 때, 내 자리에서 제일 멀리 앉아 계신 사장님이 어느 날 지적했다. 왜 그렇게 한 숨을 자주 쉬냐? 무슨 일 있냐? 내가 그런 줄 의식하지 못했기에, 좀 놀랐다. 그랬구나. 나 자주 한 숨을 쉬는 구나.


공무원을 만나고 돌아와 일정이 계속 늦춰지는 상황을 걱정하며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며, 해야할 일들을 머리속에서 정리하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 숨이 나왔다. 에휴! 왜 이렇게 일이 많나? 이 많은 일들을 다 언제 하나? 일은 많은데 왜 이렇게 하기가 싫나? 미치겠다. 휴!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자꾸 한 숨이 나온다. 웹자보 하나를 수정하면서 한 숨. 업무 메일 하나를 보내면서 한 숨. 공문을 받아 출력하면서 한 숨. 연락해야 할 명단을 작성하면서 한 숨. 해야할 일들 목록을 죽 훑으면서 계속 한 숨. 아, 진짜 나 왜 이렇게 사는거냐?


pretend


고등학교 3학년의 나, 여성을 만나기 위해 잠시 교회를 다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에게 잘 해줬는데, 여름 수련회를 가서 다들 내가 제일 착해 보인다며 짧은 연극에서 예수 역을 나에게 시켰다. 난 못 이기는 척 예수 역을 맡아 연기했다. 


대학 1학년의 나, 흥부전을 각색한 영어 연극에서 주인공 흥부 역을 맡았다. 착하게 생겼다는 이유 만으로. 놀부 마누라 역을 맡은 동기 여자아이에게 주걱으로 뺨을 수십차례 맞고, 키 크고 잘생긴 놀부 역을 맡은 남자 동기에게 수십차례 두들겨 맞았다. 아, 진짜 주인공인데, 왜 이렇게 맞아야 하는 거야? 그 영어 연극을 본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 너 생각보다 연기도 잘 하고, 잘 어울리더라.


최근에 만난 어떤 사람은 내가 거짓말을 못할 사람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렇지 않다. 난 거짓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혹은 어떤 순간에는 도저히 거짓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나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인간이 나라고 생각한다. 


palpitate


연말이고 금요일이라 행정업무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손 댈 틈조차 없었다. 왜 그리 일이 많은 건지. 일이 많으면 하나씩 빨리빨리 처리를 해야 하는데, 머리 속에서는 자꾸 최근에 만난 사람과의 즐거웠던 순간이 불쑥 떠오른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그와 주고 받은 문자를 열어 하나씩 하나씩 읽어본다. 어쩌면 별 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뛰고, 설레는 감정이 든다.


영화 [라빠르망]에서 리자(모니카 벨루치)가 막스(벵상 카셀)를 만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리자는 공원에서 막스가 자신을 부르자 몸을 돌려 뒤돌아 선 후 눈을 감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막스를 향해 몸을 돌린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뒤 돌아서서 눈을 감으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좀 정리가 되나? 아님 더 사랑하는 감정을 갖기 위해 그런 걸까?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어떤 기분이 들지. 얼마 전 좋아하는 사람이 지하철 역에서 내려 올라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척 설레였다. 이런 기분 얼마만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멀리서 그가 보일 때 차마 뒤돌아 서진 못하고, 그냥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떳다. 그 짧은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다가왔을 때 활짝 웃고 싶었다. 바보같은 얼굴 근육이 어색한, 이상한 표정을 만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눈을 잠시 감고 있으니 정말 셀레는 감정이 폭발하듯이 커지더라. 오! 이런 느낌이구나. 이번에는 좀 민망해서 몸을 돌리지도 못했고,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 떴지만, 다음엔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는 중에 계속 그의 빨간 입술이 생각 났고, 내 손을 잡았던 그의 손의 감촉이 생각났다. 


 


책 이야기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교정을 보거나 글을 쓸 때 도움을 많이 준 책이다. 지금은 집에 책상이 없지만, 예전엔 책상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자리.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이 책을 두고 살았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특별판이 나왔다고 계속 사라고 하네. 난리를 치네. 과연 구판과 신판은 어떻게 차이날까? 특별판이라면 뭐가 달라지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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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29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느라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만들고 싶었던 책자였기 때문에,
글 쓰는 것 자체는 고생은 아니었어요.
다만 많이 바쁘고 정신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쓰려다보니 좀 힘들었어요.

samadhi(眞我) 2016-10-2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나는 소책자인데요. ㅋㅋㅋ 귀여워요.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진아님께도 보여드리고 싶네요. ㅎㅎ

samadhi(眞我) 2016-11-02 00:12   좋아요 0 | URL
주세요 ㅋㄷㅋㄷ 정식 출간되는 거면 사고 싶네요.

yureka01 2016-10-29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의 모순이 석화에너지의 불균형에서 나온다는 평소 생각인데..솔라 에너지라..의미가 상당할듯합니다.표지도 깔맞춤인데요..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표지가 참 예쁘고 귀여워요.
마음에 꼭 들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문장 강화가 이렇게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오다니요.. 사야겠네요.. 집에 노란 문장강화 있는데..ㅎㅎ. 글구... 작은책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

samadhi(眞我) 2016-10-29 09:38   좋아요 0 | URL
저도 노랑 문장강화 있는데 새 책 욕심나네요. 이건 출판사에 낚이는건데...

감은빛 2016-11-02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계속 고민 중이지만,
당분간은 책을 안 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언제 다시 사버릴지도 모르겠지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문장 강화가 이렇게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오다니요.. 사야겠네요.. 집에 노란 문장강화 있는데..ㅎㅎ. 글구... 작은책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