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학창시절부터 나는 공부가 싫어서 안 했기 때문에 성적이 나쁠 뿐이지, 공부를 한다면 잘 할수 있다고 생각했고, 분명히 머리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금방 들은 숫자나 단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사람 이름과 책 이름과 어떤 특정한 단어 등을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머리가 좋다는 것은 그냥 착각일 뿐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곧잘 글짓기 숙제를 내주셨는데, 되돌아온 공책에는 늘 좋은 평이 많았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 글 중 하나를 교내 백일장에 올렸고, 비록 상을 받진 못했지만, 최종 수상작을 고르는 후보로는 올랐다고 들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수없이 적어온 글들은 늘 엉망이었고, 가끔, 아주 가끔 조금 괜찮다 싶은 글을 적었을 때에도,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했는데, 그냥 멈춰 서버린 느낌. 게다가 요즘은 글 잘 쓰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난 왜 이렇게 재밌는 글을 못 쓰는 걸까?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래, 처음부터 난 글쓰기에 재능 따위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저 오랜 착각이었을 뿐이다.
나는 학창시절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반장을 해보지 못했다. 성적이 그만큼 따라주지도 못했지만, 그때는 숫기가 별로 없었다. 처음 학년대표라는 직책으로 뽑혔을 때, 아이들이 나를 선택한 이유는 가장 술을 잘 마시고, 가장 활발하게 놀았기 때문이었다. 앞에 나서서 말을 잘했기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면 잘하진 못하더라도, 익숙해지기는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학원 강사 경험을 쌓았던 것도 도움이 되어, 제법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게 되었다. 덕분에 발표 수업을 하면 늘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서로 같은 조가 되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곤란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과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가진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하고, 이런저런 예시를 들어봐도 자꾸만 같은 말이 돌아온다. 이런! 난 정말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라고 새삼 깨닫는다. 역시 오랜 착각이었을 뿐이다.
남들은 숨도 안 쉬고 공부한다는 고3 때,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책도 꺼내지 않고 엎드려 자곤 했다. 배고프면 도시락을 까먹고 또 잠을 잤고, 잠이 깨면 창 밖을 보면서 공상에 빠졌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는데, 그럼 몰래 뒷문으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소위 문제아라 불리는 친구들을 만나 버스종점 근처 커피숍을 향했다. 근처 여자상업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알바하던 곳이다. 커피는 써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사이다나 콜라 따위의 음료수 하나 시켜놓고 여자아이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떠드는 사이에 자주 담배를 피웠고, 그 아이들이 알바였기 때문에 몇 차례 음료수를 리필받았다. 서너 시간 떠들고 나면 적당히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갈 무렵이다. 슬슬 교실로 돌아가서 선생님께 눈도장 찍어주고 다시 나와서, 이번엔 알바가 끝난 그 여자아이들과 술집이나 노래방으로 향했다. 그때 같이 놀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난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비록 얼굴은 그리 잘 생기지 못했지만, 나름의 어떤 느낌과 말발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때부터 난 여성들에게 제법 인기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 호감이 천차만별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분명 첫 만남에서 대부분의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순 있지만, 그리고 어쩌다 그런 호감이 발전해서 연애감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극히 드문 일이었고, 그런 정도만으로는 인기 있다고 착각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 모든 착각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착각이 실제인 양 다시 착각에 빠지는 경우도 생기니, 나라는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이 아닌가! 하루 또 하루 어떤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까? 그 착각에서 벗어나 현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비참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워도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 조금 행복한 것은 아닐까 싶다.
※ 이 책을 읽고 쓴 글이 아닙니다.
다만 제목이 같아서 가져왔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