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어떤 중년 남성이 화를 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막 주위를 돌며 발을 굴러댔다.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주위를 돌다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하시라고요.˝
뭘 하라는 것인지 듣지 못했다. 그는 붉어진 큰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말했다.
˝그렇게 계속 하시라고요. 어디 마음대로 계속 해보시라구요.˝
그는 목소리가 컸다. 그 큰 목소리로 바로 눈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귀가 아팠다.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눈빛.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가 누구인지, 왜 나에게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지 알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싫어도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참고 듣고 있어야 했다. 그는 다시 발을 구르고 주위를 돌았다. 또 소리를 질러댔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그를 바라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내 겉옷과 가방을 챙겨줬다. 그는 자상한 태도로 겉옷을 펼쳐 내 어깨에 둘러주었고, 내 눈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가자.˝
체격이 크다고 느낀 여성이었다. 그는 내가 머뭇거리자 내 어깨를 살짝 잡아당기며 몸을 돌려주었다.
˝가자. OO으로 가는 거지?˝
목적지를 듣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남성을 신경쓰고 있었는데, 이 여성이 등장한 이후 이 화내는 남성의 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그는 여전히 있는 힘껏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중인데 갑자기 그의 목소리만 누군가 일부러 볼륨을 줄여놓은 것처럼 작게 들렸다. 대신 속삭이듯 말하는 이 여성의 목소리는 또렸이 잘 들렸다.
˝가면서 OO 먹고 갈까? 배 고프지 않아?˝
이번에도 목적어를 듣지 못했다. 여전히 화를 내는 남성을 바라보는 중인데, 이 키가 큰 여성이 내 손을 잡더니 잡아끌었다.
어떤 큰 건물 복도를 끌려가듯 걸었다.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멈춰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웅성웅성 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여성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다. 앞서서 성큼 성큼 걷는데 따라잡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손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성이 저만치 앞으로 가 있었다. 나는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걸음을 재촉해 그를 쫓아가려 했는데 그는 더 멀어졌다. 그 여성이 멀어지자 넓은 복도에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뭔가 내 험담을 하고 있는 걸까? 나를 쳐다보고 그들끼리 무언가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싶었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가장 가까이 서있던 두 사람이 곁눈질로 나를 힐끗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들 중 한 여성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아주 짧은 순간 입꼬리만 웃는 표정을 보이고는 대화를 나누던 다른 여성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여성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보고 눈꼬리와 입꼬리만 웃는 표정을 보여줬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하고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입 모양으로는 아마 ˝밥 먹었어요? 우린 먼저 먹고 왔어. 맛있게 먹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들이 나를 스쳐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도 차례로 나에게 눈과 입으로만 웃는 표정을 짓고 뭐라고 짧게 말을 걸면서 스쳐지나갔다.
여러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와 잘 들리지 않는 말로 뭐라고 말을 건네고 휙 스치듯 지나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키가 큰 남성도 있었고 키가 작은 여성도 있었다. 그러다 붉은 색 코트를 입은 한 사람이 다가왔는데, 그는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일부러 눈을 맞추며 억지 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어쩐지 그를 붙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는 막 나를 스쳐지나가는 찰나였는데 옷깃을 잡히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놀란듯 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 여기 있었어?˝
밝고 목소리였다. 처음에 누군가에게 붙잡혀 놀랐던 얼굴이 짧은 순간 반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 표정이 낯익다고 느꼈다.
˝어디가? 나는 이제 돌아가려고.˝
나는 그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묻고 싶었는데,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눈짓과 손짓을 해서라도 내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는 잠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 나 얼른 가봐야 해. 담에 봐.˝
그를 놓치면 안 될것 같아서 얼른 다시 그의 붉은 코트 소매를 붙들고 함께 가자고 말을 걸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응? 같이 갈거야? 그럼 우리 좀 서두를까? 나 지금 늦었거든.˝
그는 키가 작았음에도 걸음을 빨랐다. 소매를 붙든 내가 따라잡기 어려웠다. 열심히 따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붙들고 있던 소매를 놓쳤다. 빨간 코트의 여성도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졌다.
어딘지 모를 크고 넓은 복도에 남겨져 멍하니 서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면서 내 등을 툭 건드렸다.
˝여기 있었네.˝
돌아보니 다소 딱딱한 표정을 지은 여성이 서 있었다. 긴 머리에 정장을 입었다. 그는 다시 손가락으로 내 등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계속 여기 있을거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나는 그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왜 나는 말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 말도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빨리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응? 왜? 왜 말이 없어?˝
아까 키가 크고 체격이 큰 여성이 갑자기 사라지던 무렵부터 이게 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왜 특정한 사람들의 말만 들리고 다른 말들은 안 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말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라고 말을 하며 답답함을 전하고 싶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왜 그러는지 말을 해야 알지.˝
그는 처음엔 다소 차가워보이는 얼굴로 표정이 바뀌지 않다가 갑자기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얼굴을 크게 찡그리더니 화가 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 나도 몰라. 그러고 있으면 일이 해결이 돼?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는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투로 주먹을 쥐고 내 팔을 가볍게 툭툭 쳤다. 왜 그가 화가 났는지 몰랐지만, 나야말로 지금 화가 나고 짜증나는 상황이지만, 일단 그의 화를 풀어야 뭐든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사과했다.
˝미안해.˝
이번엔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내 사과를 듣고도 한동안 물끄러미 내 얼굴을 살폈다. 다시 처음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겨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 걸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근데 왜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지? 머리속이 복잡했다.
긴 머리의 여성은 다소 차가운 얼굴로 한참동안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다가 문득 포기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겠다. 일단 나랑 같이 돌아갈까?˝
함께 돌아가자는 제안에 이르러서야 그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치고는 앞서 걸었다.
˝얼른 가자. 이미 늦었어.˝
사람들로 가득찬 넓고 큰 하얀 복도에서 그가 걸어가자 길이 열리듯 사람들이 비켜섰다. 그는 앞서 걸었고 나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고 발을 빠르게 놀렸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문득 배경이 바뀌며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앞서 걷던 긴 머리의 여성이 고개만 돌려 나를 보며 뭔가 말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갈증
잠에서 깼을 때 바로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생생한 꿈을 꾸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느낀다. 마치 인터넷에서 버퍼링에 시간이 걸리듯. 나는 이제 늙고 낡은 인간이라 성능이 떨어지는 피씨에 느려터진 인터넷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깨고 나서 생각해보니 마지막 꿈 바로 앞에 다른 꿈의 내용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떤 막연한 이미지들과 조금은 선명한 이미지들이 머리 속에 떠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 앞의 꿈에서는 어려진 아이들이 나왔다. 큰 아이는 대여섯살 시절의 모습이었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꿈 속에서는 나에게 아이들이 더 있었다. 현실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그 꿈 속의 내 아이들은 누구였을까? 누군가 엄청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던 것도 같고, 누군가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잊고 있던 얼굴이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사람들이 전생이라 믿는 것, 윤회라고 믿는 것이 이렇게 반복되는 꿈 속의 인생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꿈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아보고, 어떤 꿈에서는 외국어에 유창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는 인물이 되어보고, 어떤 꿈에서는 어떤 무리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뭐가 뭔지 알 수없는 모호한 꿈들도 많고 상대적으로 명확한 상황인 경우도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꾸는 그 꿈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벌써 몇 겁의 인생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저마다 역할이 뒤섞인다. 친구가 적이 되기도 하고, 잘 알지 못하는 이가 친한 친구가 될수도 있다. 그래서 윤회를 거듭하며 인연을 맺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꿈에서 만난 여성들은 모두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잠에서 깬 이후 고민을 해봐도 딱 현실의 어느 특정한 사람들과 이어지는 특징을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그건 그 당시 꿈 속에서도 내가 아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이미지나 상징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에서는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데, 꿈에서만이라도 뭐 하나라도 바라던 것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아무리 실감나고 생생해도 그건 현실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다시 매트릭스 속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빨간약을 선택한 순간 다시 될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목이 마르다. 아무리 물을 많이 들이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갈증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