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저항의 나이


눈꽃
너는 피어라 나는 네 안에 지마
그래도 울지 않으리
이마 위에 아이 눈썹 만한 눈이파리
예수가 죽어 간 나이
시인이 요절한 나이
초월하지도 못했네 순응하지도 않았네
아 아직은 저항의 나이
내가 쓴 길도 내가 지운 길도
덮고야 마는 단호한 눈발이여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
당신에게 가야하네
눈꽃 피는데, 당신에게 닿기도 전에
눈꽃만 피는데,
우두둑 솔가지 부러지고
나는 먹먹한 눈물 한 방울로
길을 녹이네


문동만 / 아직은 저항의 나이 / 삶이 보이는 창




한때 운동권이었거나 진보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대체 몇 살이 되면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게(보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많은 선배들이 나도 한때는 운동권이었느니 하고 썰을 풀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한숨만 나온다. 그런 모습으로 내게 큰소리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을까? 저 나이가 되면 그런 부끄러움마저도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람이 무뎌지는 것일까? 진보는 날카로움이라고 했건만 나이를 먹어가면 무뎌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궁금증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똑같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인가? 글쎄 어떨까? 나이가 많이 들어도 멋지게 살고 계신 선배님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멋지게 살지 못하는 선배들이 사실은 훨씬 더 많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한참 이른 것 같지만, 나는 혹 어느 후배에게 한심한 선배가 되어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다. 아직 한창 어릴때(그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젊은 열정만으로 똘똘 뭉쳐진 말썽덩어리였을 때)의 나는 선배들 욕을 참 많이 했다. 그땐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선배들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서 싫어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자연스레 운동을 접는 선배를 보면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운동을 접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길을 가는 것을 용서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혹은 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길이 아주 어긋난 길이 아니라면 박수를 보내줄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욕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간혹 아주 어긋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간혹 자신이 새로 선택한 길이 옳다고 여기고, 진보나 운동을 그저 어린 치기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내게 하루라도 빨리 자기처럼 되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아, 스스로를 386세대라고 자부하면서, 나에게 어서 빨리 철이 들라고 큰 소리 치는 사람들. 정말 싫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떨까? 나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을까? 나는 아직 처음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젊은 날의 내가 보기에, 난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는걸까? 글쎄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것들에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가끔 누군가가 나이를 물으면 스물아홉 이라고 답한다.(신기하게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스물아홉이란 내게 어떤 상징을 지닌 숫자이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 강사는 나이가 사십대 중반쯤 되었는데, 절대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늘 스물아홉 이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 해에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은 영원히 스물아홉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이에게 스물아홉과 나에게 스물아홉은 아마 다른 상징을 가진 숫자이겠지만, 나도 그이처럼 해보고 싶다는 생각 가끔 그런 장난을 해본 것이다.  

나는 이십대의 치기어린 열정과 에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좋다! 세상에 대해 한껏 날을 세운 당찬 기백이 좋다! 좌충우돌 여기저기 부딪히고 찢기어 상처입은 순수함이 좋다! 뭐하나 거리낄 것 없이 마음가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좋다!

서른을 넘어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긴 어느 날에도 나는 당당하게 '아직은 저항의 나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문동만 선배처럼 살아간다면, 충분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 예전 블로그 글을 살짝 다듬어서 옮깁니다. 
여기서 돌발퀴즈 하나 나갑니다. 
이 시집의 표지에 실린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요?
댓글로 정답을 맞춰주신 한 분께 제 맘대로 선물을 하나 보내드겠습니다.
참고로 2007년엔 평택 대추리, 2008년엔 기륭전자 투쟁현장,  
2009년엔 용산참사현장에 가면 늘 이 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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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4-1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모르겠어요.ㅠ
하지만 감은빛님 돌발퀴즈는 좋아요.
종종해 주세요.ㅎㅎ

감은빛 2011-04-18 16:07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그냥은 어려울것 같아서, 힌트를 최대한 드렸는데....
돌발퀴즈를 자주 하고 싶어도, 뭐 내세울 상품이 별로 없어서요. ^^

2011-04-18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4-18 15:58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힌트를 너무 많이 줘서, 쉽게 맞추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곧바로 맞춰버리셨군요. ^^

2011-04-1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8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4-1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답은요...?

감은빛 2011-04-18 17:42   좋아요 0 | URL
앗! 저 위에 댓글이 비밀댓글이었군요. 죄송!
정답은 송경동 시인입니다.
항상 투쟁현장에서 볼 수 있는 분이지요.
기륭 대책위에서는 대표였던가 그렇고,
용산참사 대책위에서는 집행위원장이가 뭐 그런걸 맡고 계셨었죠.

노이에자이트 2011-04-1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운동권 출신들은 사상은 진보적인 것 같지만 실제 하는 행동은 권위주의적이죠.학번 따지고 나이 따지고...게다가 성격도 독선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들도 많구요.그리고 별로 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것 같고...

감은빛 2011-04-18 17:56   좋아요 0 | URL
아,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많죠.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그렇게 권위적이고, 학번이나 따져대고,
독선적이고 머리에 든 게 없는 이유는 학생운동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생의 틀을 벗어나 좀 더 넓게 보고,
운동을 해보면 좀 달라질 수도 있을텐데요.

대다수의 운동권 출신이라는 분들이 80년대 말에 최루탄에 눈물 좀 쏟아보고,
각목 좀 휘둘러 봤다거나, 보도블럭 깨뜨려서 던저봤다거나.
그런 경험들이 한계인것 같더라구요.
어디가서 운동권 출신이라고 안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들이 또 얼마나 열심히 얘길하고 다니는지 원!

노이에자이트 2011-04-19 15:03   좋아요 0 | URL
너희들이 육이오를 알아? 하는 소리 들어서 지겨웠던 세대들이 이젠 자기들이 똑같이 인생후배들에게 잔소리 하고 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4-19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이 시집 저도 가지고 있는데~~~
돌발퀴즈 넘 늦게 봤네요.

전 마흔을 '아직은 저항의 나이'라고 보지 않고요, 경계를 지우는 나이라고 봐요.

감은빛 2011-04-19 01:24   좋아요 0 | URL
네, 양철님이라면 쉽게 맞추셨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경계를 지우는 나이라,
어떤 깊은 뜻이 있는 말인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어요.

루쉰P 2011-04-1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저항의 나이라 전 꿈을 잃은 자가 저항을 잃어버린 것이라 여겨요. 그 꿈이 당장에는 실현시킬 수는 없다고 해도 1%라도 그 쪽 방향을 향해 가는 것, 물론 살면서 전체적으로 그 방향을 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쪽으로 그 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할 때 저항의 나이라 여겨요.
전 아직도 저항 중이죠. 푸훗.

감은빛 2011-04-20 13:25   좋아요 0 | URL
루쉰님의 진지하고 성실한 댓글은 늘 저를 흐뭇하게 합니다!
루쉰님 저랑 비슷한 면이 가끔 보여요.
고맙습니다!

저녁바람 2011-04-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다소곳한 글이네요.

감은빛 2011-04-20 13:27   좋아요 0 | URL
다소곳하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일까 잠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음 어떤 뜻으로 남긴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5-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이 달의 마이 페이퍼에 당선되신 것 축하드려요. ^^ 이름 발견하고 바로 들어와서 축하드립니다.

저도 너무 부끄럽게도 당첨이 됐는데 상품으로 받은 알사탕 4000개를 바꾸니 2만원 너치 책을 살 수 있더라구요. ^^ 완전 신나서 기절할 뻔 했어요. 그걸로 일요일 무료한 근무를 어떤 책을 살까하며 살 떨리게 고민하면서 주문했어요. ㅋㅋㅋ

감은빛 2011-05-15 23:25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저도 루쉰님께서 당선된 것 봤어요!
예전에는 마일리지로 주더니, 요즘은 알사탕으로 바뀌었네요.
뭔가 적응이 잘 안되지만, 그래도 뭐 당선된 건 감사한 일이지요.

그 덕분에 무료한 시간을 흥미롭게 보냈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안읽은 책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당분간은 책을 사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자꾸만 보관함과 장바구니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게 됩니다.
조만간 또 주문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