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인연, 그리고 첫사랑


지난 주에 했던 SF모임은 역대 최고의 흥행을 이뤘다. 일단 3개 단위의 연합 소모임이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참석자 수가 많지 않았던 경험을 극복하고 현재 참여 의사를 밝힌 인원이 모두 다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고(그래봐야 몇 명 되지도 않지만 ㅠㅠ) 그 다음으로 참석자 대부분이 이 책이 참 좋았다는 것을 고백하듯 이야기를 나눈 점이 정말 좋았다. 한동안 소원했던 이 모임을 다시 활성화 시키고자 내가 제안한 방법, 미리 공유 문서에 나누고 싶은 주제와 내용을 간단히 적어 달라고 한 것이 꽤 괜찮은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중에 기록으로 남아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글을 하나 쓸 생각인데, 오늘 하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다. 나는 책 모임에서 주제나 소재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는 부분이 바로 연결되는 작품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소설을 읽고 떠오르는 혹은 연상 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소설이던, 만화나 웹툰이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던 상관없이 그로 인해 확장해서 다른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정말 재미있다고 여기고 또 중요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꽤 재밌게 읽었던 이 책의 두 번째 단편소설 [우리를 아십니까]를 두고 연결되는 작품들을 생각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이 딱 없었다. 조금 더 고민하거나 조금 더 확장하면 연결되는 작품들이 없을 수 없지만, 그 당시엔 나도 여유가 없어서 조금 고민하다 그만 비워두고 다음 단편으로 넘어갔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모임을 앞둔 시점에 뭐라도 하나는 적어야 할텐데, 계속 생각나는 작품들이 조금씩 애매하다는 생각에 고민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이렇게 순수한 사랑, 게다가 작중 두 사람은 첫사랑이었을텐데, 첫사랑을 그려낸 작품은 생각보다 많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순간 번뜩하고 뭔가를 떠올렸다. 바로 내 첫사랑. 그 달콤하고도 쓰린 기억을 담았던 단편 소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을 거슬러 1996년으로 가야 한다. 학생회 활동과 학회 활동과 동아리 활동 그리고 짝사랑했던 여성에 대한 감정 때문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던 시절. 대학교 2학년은 사실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시기였음에도 외부에서 끊임없이 많은 것을 요구 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 욕심이 많았던 나는 빨갱이 운동권으로서 학생운동도 하고, 학생회 활동도 하고, 학회와 동아리 활동도 하느라 정말 너무 바쁜 시간을 보냈고, 그 와중에도 너무 좋아했던 여성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물론 곧 군대를 갈 에정이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는 생각으로 거의 자포자기와 가까운 마음이기는 했다. 그런 와중에 동아리 후배 하나가 본인이 동아리를 잘 지키고 있을테니, 군대에 잘 다녀오라는 얘길 하면서 자신이 동아리 소식지를 만들테니, 나에게 단편 소설 하나를 써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입대를 위해 부산을 떠나는 바로 전날까지 단편소설을 하나 썼다.


그 시절엔 피씨도 타자기도 없어서 나는 공책에 손으로 직접 글을 써서 소설을 적었었다. 나는 꽤 유명한 악필이라 이 글씨를 과연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다만, 그 후배도 나 못지않은 악필이라 생각해서 그 녀석은 알아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입대를 앞두고 소설을 써나갔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자세히 적을 수도 있겠지만, 이 첫사랑은 묘하게도 신경숙 소설가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의 제목과 형식을 신경숙의 소설들에서 차용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창작이라는 과정은 지난하고 힘들고 어렵다. 그 당시에도 그랬다. 나는 생전 처음 군대를 가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더 많이 흔들렸고, 당시 짝사랑했던 여성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많이 괴로웠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것도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지켜야 하는 법. 나는 입대하기 바로 전 날 이 소설을 완성했고 두꺼운 공책 한 권을 후배에게 넘기고 열차에 올랐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들은 소식은 그 후배가 결국은 제대로 동아리를 운영하지 못하고 잠수를 타버렸고, 준비했던 소식지도 결국은 흐지부지 없어져 버렸다는 거였다. 뭐, 세상에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렇게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어느 시점에 휴가를 나와서 한참 후배들과 만났을 때 묘한 상황을 겪었다. 그때 나는 아마 상병 말호봉 정도, 곧 병장이 될 것이고, 병장이 되고 나면 조금만 더 버티면 제대할 수 있는 시기였다.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고, 군생활 자체를 경멸하면서도 이왕이면 잘 해야 한다는 어찌할 수 없는 지긋지긋한 본능 때문에 포상휴가도 제법 받았었는데, 그 날도 포상 휴가를 나왔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동아리 선후배들 자리에 낄 수 있었고 별 말 없이 시간을 지나고 있었는데, 내 이름을 물어본 한 후배가 깜짝 놀라며 자기 옆 친구에세 호들갑을 떨며 내 이름을 강조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상황은 이랬다. 동아리를 책임지고 소식지를 만들겠다고 큰 소리 쳤던 후배 녀석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적해 버렸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주고 갔던 그 공책을 두 세명의 여성 후배들에게 던져 주고 타자를 쳐서 문서 파일로 만들라고 지시 했었다고, 그리고 그 지시를 받아서 순진하게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를 억지로 타이핑 했던 사람들이 바로 내가 만났던 후배들이었다. 그런데 그 후배들의 반응이 좀 심상치 않았다. 내 소설은 첫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쓴 것인데 당연히 100퍼센트 경험은 아니고 허구의 이야기이다. 아직 어렸던 여성 후배들은 내 소설을 소설이 아닌 에세이 처럼 받아들였고, 나를 마치 비련의 주인공처럼 대하며 자신들이 내 소설을 열심히 타이핑 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입대하기 바로 전 날까지 공책에 써서 넘겼던 소설이었기에 나에게 복사본은 없었다. 다만 정말 긴 시간 고심해서 썼기에 전반적인 내용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우연히 만난 후배들이 자신들이 타이핑한 문서, 결국 소식지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문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첫 사랑의 기억을 소설로 남긴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 소설의 작품성이나 내용은 절대로 다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지만.


암튼, 나는 그 두번째 단편에서 연결되는 작품을 내가 썼던 단편 소설을 언급했다. 그때는 시간에 쫓겨서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썼고,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 읽은 이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단편 소설이기는 하니까 그게 뭔 문제야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모임에서 내가 이 이야기를 전하자 모임 구성원들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 소설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하던가. 아무도 모르는 소설을 제목과 내용만 던지고 그렇다고 하면 누가 납득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건 내가 쓰긴 했지만, 발행된 적이 없는 어쩌면 그럴 가치조차 없는 글이었기에 언급하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암튼 나는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글을 썼는지, 입대를 앞둔 어린 청년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썼는지를 전달하며 달랬다.
















그리고 며칠 시간이 지나서 꿈을 꾸었다. 저번에 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여러 상황에 처한 꿈을 꾸었지만 반대 성별인 여성이 되어 보는 꿈을 꾼 적은 없는 것 같다는 내용을 썼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글을 쓰고 며칠 후에 거짓말처럼 여성으로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 좀 신기했다. 꿈에서 나는 꽤나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현실의 나는 외모로는 정말 볼품없는 늙은 남성일 뿐인데, 꿈 속의 나는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를 좋아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꿈도 어느 정도는 현실을 반영할 수 밖에 없어서 꿈 속에서의 내 삶도 그리 평탄치 않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이 꿈은 확실히 신기했다. 꿈을 한창 꾸는 과정에 중간에 깨달았는데, 내가 여성이 되었구나. 내가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이게 꿈이라고 깨달은 시점이었고, 이후로는 그 전과 달리 좀 뻔한 결말로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아, 내가 여성이 되었구나 하는 순간 그게 꿈이란 걸 깨달은 것이고, 그게 꿈에서 깨어나는 흐름으로 넘어갈 확률을 높인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대학 시절 꽤 긴 시간 짝사랑했던 여성에 대한 꿈을 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너무나도 소심해서 아주 오래 좋아하고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꿈 속의 나는 너무 대담하게 그 시절 그 여성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넸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현실은 절대 그랬을 리 없으니. 그리고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결말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 여성은 나를 거절했고,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져 삶을 정상적으로 이어갈 수 없었다. 비록 꿈 속의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멍청하고 바보같은 일이 아닌가. 나 같은 인간을 누가 어찌 좋아할 거라고 그렇게 바보처럼 고백을 한 단 말인가. 제발! 


딱 그 시점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샤워를 하며 꿈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생이었던 시절, 정말 긴 시간 짝사랑했던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한 편으로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나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설레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30년 전 일이다. 이미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다.


그 시절 우리


원래는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건데, 이건 다음에 써야겠다. 올해 2월 4일 나는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 라는 작품에 대한 글을 썼었다. 내 소중한 이웃 잉크냄새님께서 소개해 주신 [後來] 라는 노래 덕분에 알게 된 류뤄잉 감독의 영화였다. 이 영화를 실제로 본 것은 25년 연말이었다. 아주 좋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여러가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에 두 번을 더 보고 류뤄잉의 노래를 수백번 들으며 곱씹고 또 곱씹어 쓴 글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한국에서 리메이크 영화 촬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아니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원작 영화가 꽤나 좋았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을 보고 다시 꼭 글을 써야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를 봤는데 실망이 컸다. 어쩌면 기대가 큰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원작인 중국영화를 꽤나 좋아했으니까. 한국 영화는 정말 너무나도 그냥 한국 영화였다. 세속적이고, 적당히 후려치고, 적당히 뭉개고, 적당히 빠져나가는. 너무나도 젼형적인 한국 영화였다. 원작의 감흥이나 감동은 많이 사라졌다. 다만 그렇다고 이야기 자체의 감동이나 감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식으로 포장된 이야기는 중국 이야기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나는 해당 이야기의 주인공 세대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많기 때문에 곧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지점들이 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시절의 그런 감성들을 잘 살려냈다고 본다.


SF 모임에서 읽었던 책 이야기와 [먼 훗날 우리]의 리메이크 작인 [만약에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로 글을 쓸 생각이다. 다만 오늘은 그냥 그냥 그냥 멍하니 자판을 두드려 본다. 생각의 끝에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첫 사랑의 그 분을 꿈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쁜 현실에서 내가 늘 놓치는 어떤 것들을 꿈에서라도 챙겨 가기를.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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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10-01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멍하니 자판을 두들겨도 이런 글이 나온다는거죠? 공을 많이 들인 그 글들은 기대를 갖고 기다리겠습니다. ^^ 토막난 우주를 안고서는 저도 전에 볼까하고 찜해뒀다가 저런 식으로 특정한 주제로 작가들이 각자 글을 쓰는 방식의 작품집이 저에게는 안 맞더라구요. 맞는 작가와 안 맞는 작가가 너무 뒤섞여 있어요. ㅎㅎ 하지만 감은빛님 글을 보니 이 책에 다시 호기심이 생기네요. ^^

감은빛 2026-10-03 18:07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두드렸던 새벽에 너무 피곤하고 졸렸는데, 이 글은 꼭 쓰고 자고 싶어서 억지로 자판을 두드리며 버텼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어요. 바람돌이님.

그죠. 저렇게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책들은 호불호가 명확하죠. 상대적으로 일정한 퀄리티를 보장하기 어려운 구조죠. 근데 저 책은 확실히 괜찮았습니다.

잉크냄새 2026-10-01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의 짝사랑이나 첫사랑이 완성형의 결말을 가지는 경우가 별로 없기에 소식지에 실리지 못한 글의 내용이 더 궁금해지네요. ㅎㅎ

감은빛 2026-10-03 18:09   좋아요 0 | URL
네, 잉크냄새님. 당연히 제 첫사랑도 처참하게 실패했었죠. 달콤했던 기억과 쓰리고 아픈 기억을 담아 썼던 소설이었습니다. 궁금하시게 해서 죄송하지만, 저 소설 문서 파일이 더이상 열리지 않더라구요. 아주 오래된 파일이라 그런 것인지, 뭔가 오류가 생긴 것인지.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열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chika 2026-10-02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몇개이상 혹은 감은빛님 소설에 대한 호기심 인원이 많으면 글 업로드 해주기... 뭐, 이런거 없을까요? ^^;;

감은빛 2026-10-03 18:11   좋아요 1 | URL
치카님. 요 바로 위에 잉크냄새님 댓글에 답글로 썼는데, 해당 소설은 파일이 열리지 않아서 저도 다시 읽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 물론 소설의 완성도가 너무 처참해서 잘 열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