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랜베리스
길을 걷다가 낮익은 음악을 들었다. 초등학교 근처 골목이었는데, 5학년이나 6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어떤 음악을 부르고 있었다. "뚜 뚜두뚜 뚜 뚜두뚜 뚜 뚜두뚜 뚜 뚜두뚜" 딱 듣자마자 내 머리속에는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더 크랜베리스의 [Ode to my family] 였기 때문이다. 마치 천사처럼 느껴졌던 그 모습을 티비 화면으로 본 것이 그룹 크랜베리스를 처음 접한 것이었고, 돌로레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이었다.
한때 우리나라 광고 음악으로도 많이 쓰였고, 드라마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잔잔한 멜로디와 아름다운 목소리가 인상적인 곡. 나는 크랜베리스의 음악들 중에 상대적으로 좀 시끄럽고 흥겨운 곡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저 곡은 꽤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에도 이 곡이 티비를 통해 가끔 나오는걸까? 저 아이들은 어떻게 저 노래를 알고 길에서 함께 부르는 걸까?
90년대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알라니스 모리셋, 셰릴 크로우와 함께 가장 좋아했던 가수가 바로 돌로레스 오리어던이었다. 2018년 1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몇 달 뒤에 접하고 한참 멍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Zombie], [Dreams], [Linger], [I just shot John Lennon], [Fee Fi Fo], [Shattered] 등의 노래를 들었다. 정작 [Ode to my family] 를 다시 찾아듣지는 않았다.
오버 트레이닝
운동하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근손실'이라는 건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두번째 두려워하는 것은 뭘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오버 트레이닝'이다. 쉽게 말해 무리하는 것. 내 체력보다 과하게 운동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운동을 과하게 해버리면 근육이 성장할 기회가 오히려 줄어들고 신체 전반적인 운동능력이 오히려 떨어져서 역효과만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요일별로 운동하는 부위를 정해놓고 분할 운동을 하곤 한다. 월요일은 상체, 화요일은 하체, 수요일은 코어, 다시 목요일은 상체, 금요일은 하체, 토요일은 코어, 일요일은 휴식 이런 식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나는 고립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 전신 운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런 분할 운동이 의미가 별로 없다. 운동을 쉬지 않고 하고 싶을 때는 상체와 하체로만 구분해서 나눠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에도 코어는 늘 운동을 하기 때문에 코어를 따로 뺄 필요는 없고, 수요일에도 휴식을 넣어서, 상체, 하체, 휴식 이런 식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상체를 중심으로 운동한다고 하체가 놀지는 않기 때문에 상체, 하체를 분할하는 것도 의미가 별로 없고, 오히려 오버 트레이닝이 될 확률이 높다.
과거의 나는 차라리 운동, 휴식, 휴식, 운동, 휴식, 휴식 이런 패턴으로 반복하는 것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운동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크게 다친 후에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는 이런 개념이 다 필요가 없다. 일단 일상 생활 자체를 소화하기에도 체력이 딸리는 상황이라 별도로 운동을 할 기회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더라. 주말을 푹 쉬고난 일요일 오후가 일주일 중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인데, 나는 주로 그때 운동을 하고 일주일을 골골거리다가 가끔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운동을 하고 다시 일요일로 넘어가곤 한다. 그 일요일에는 컨디션이 좋다보니 아무래도 적정한 선에서 멈추지 않고 자꾸 운동을 더 하고 싶어지는데, 이게 가장 나쁜 판단이자 선택이 되곤 한다.
지난 주에는 어쩌다 목요일 저녁에 컨디션이 꽤 괜찮았다. 그날따라 안되던 동작도 잘 되었고, 신기하게 별로 힘이 들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하고 싶었던 다른 동작들을 시도했고, 아주 오랜만에 예전처럼 운동이 된다는 것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간 너무 무기력하게 힘도 잘 못쓰고, 동작도 마음대로 안 되어서 운동을 하고서도 그닥 좋은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암튼 그날 한참 운동을 하다가 문득 내가 이미 체력의 한계를 넘어 운동하고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그때 멈춰도 이미 늦은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몇 가지 동작을 더 했고 다음날 정말 극심한 근육통과 온 몸의 피로감을 느꼈다. 다행히 금요일은 쉬는 날이었지만, 이것저것 할 일은 있었다. 오후에 간신히 몸을 움직여 몇 가지 일을 처리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주말 내내 컨디션은 돌아오지 않았고, 화요일인 오늘도 아직 다시 운동을 할 정도의 체력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오버 트레이닝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반응들
"예전에 운동한 걸 몸이 기억하고 있나봐. 빨리 몸 만드니까 멋있더라."
부상에서 회복하면서 다시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보려고 가끔 운동하는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고 있다. 가끔 사진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데, 어느날 그걸 본 친구가 톡을 보내왔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친구의 반응이라 좀 당황했다. 나로서는 아직 몸 만들기를 시작도 못한 상태인데, 벌써 이런 반응이라는 것도 조금 당황스럽다.
"한 몇 년만 더 지나면 이제 네가 나보다 오빠처럼 보일거야."
나보다 한 열살 정도 많으려나. 암튼 50대인 선배 활동가가 장난처럼 한 말. 예전에도 흰 머리는 많았는데, 오랜만에 봐서 흰머리가 더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살이 빠진 것도 나이들어 보이는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수염 탓이겠지만.
"어머! 크게 다쳤다는 얘길 들었는데,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살 빠졌다는 얘길 해서 이제 그 얘기는 좀 그만들었으면 싶은데, 계속 피곤하고 지친 상태라서 그런지 살은 계속 더 빠지는 중인 것 같다. 예전이었다면 오히려 듣고 기분이 좋아졌을법한 말인데, 이 말이 이렇게 듣기 싫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것도 신기하긴 하다.
3월을 보내며
매 월말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지겹긴하지만, 정말 3월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누군가는 이제 늙어서 그런 거라고, 앞으로 점점 더 시간이 빨리 갈 거라고 하는데, 그럼 60대나 70대쯤 되면 얼마나 더 빨라진다는 걸까?
다시 일을 시작한 2월 1일도 바로 엊그제 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업무 복귀한지 두 달이 다 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루 하루 허무하게 보내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지는데, 그것도 하도 반복되는 일이니, 그 서글픔에도 점점 무뎌지는 것 같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무뎌짐이 아닐까? 슬픔에도, 아픔에도, 외로움에도 무뎌져버려서 외로운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아픈지도, 슬픈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일 것 같다.
제목을 뭐라고 적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3월을 보내며' 라고 두드렸다. 그걸 깨닫자 마자 내 속의 내가 말했다. "아직 하루 남았다." 원빈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