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고양이
작년 11월 초였다. 애들 엄마가 사무실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를 마주쳤는데, 주위에서 엄마 고양이를 찾지 못했고, 건강 상태가 나빠보여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가 집으로 데려왔다. 마침 그 날은 내가 아이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애들과 밖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데려다주면서 잠시 그 집에 머물렀는데, 애들 엄마가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애들과 함께 나중에 애들이 '차차'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차차와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별로 없었다. 그 집을 나온 지도 이제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아이들은 차차와 빠르게 친해졌고, 차차만 바라보고 지내게 되었다. 이젠 나를 만나는 저녁에도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차차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그러다 12월 말에 애들 엄마가 애들과 제주에 여행을 계획했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 집에 들러 차차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길 부탁했다. 그 정도는 해줄수 있으니, 당연히 승락했다. 그런데 큰 아이가 갑작스레 여행을 안 가고 혼자 집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애들 엄마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을텐데, 큰 아이가 아빠 핑계를 댔다. 아빠랑 같이 지내면 괜찮지 않냐고. 나는 큰 아이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아이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일주일에 항상 3일 정도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머물도록 해왔지만, 큰 아이는 학원과 숙제, 공부, 친구들과의 약속 등을 이유로 오지 않는 (혹은 못 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작은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큰 아이와 둘이 지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엄마 보다 아빠 라는 말을 먼저 했던 아이,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빠 딸이었던 아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시를 잘 써서 나 뿐 아니라 유명한 시인도 놀라게 만들었던 아이,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예고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했던 아이, 원하던 예고 문창과에 합격했다고 엄청 좋아하던 아이, 몇 년 전부터 키가 훌쩍 자라 엄마를 제치고 이젠 아빠와 비슷할 정도로 자란 아이. 태어나자마자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탯줄을 잘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언제 저렇게 자랐나 싶은 아이와 며칠 연속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함께 그 집에서 생활하는 일은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 집에 며칠 머물면서 큰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사춘기 이후로 다시 한층 가까워졌는데, 또 아기 고양이 차차와도 친분을 많이 쌓았다. 물론 내 관점에서 차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차차가 동거인인 자신들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애들 엄마나 아이들이 차차를 안으면, 곧바로 내려달라는 듯 애처로운 느낌의 울음소리를 내곤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가려고 몸을 뒤틀고 네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런데 내가 안으면 가만히 내게 안겨 있는다. 울음소리도 안 내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내려가려고 버둥거리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그땐 버둥거리다가 내려가버리곤 한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 되었는데, 내가 그 집에 가서 차차를 안는 순간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신감을 호소하는 감탄사를 내질렀고, 애들 엄마는 물끄러미 나와 내게 안긴 차차를 쳐다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또 한 편으로 차차는 다른 고양이들이 으례 그러듯이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몸을 부비지 않는데, 그러니까 동거인인 애들 엄마와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데, 가끔 내가 그 집에 가면 내게는 그런 행동을 한다. 작은 아이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차차가 수컷이라서 남자인 아빠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좀 많은 편
어린이들이 유난히 나를 잘 따르고 좋아하곤 하는 일은 익숙하다. 차차도 어린 고양이니까 어린이라고 본다면 나는 유난히 어린 생명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어떤 숙명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어려서부터 명절이 되어 할머니네 댁에 가면 내 밑으로 사촌과 육촌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대략 10명 가량의 동생들을 모두 내가 돌봐야했다. 어른들은 내게 돈을 쥐어주며 동생들에게 공평하게 과자를 사주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나도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이였건만, 나는 늘 맏이라는 이유로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숫자의 동생들을 떠맡아야 했다.
대학 시절 농활을 가면 동네 어린이들은 모두 내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고작 열흘 남짓의 농활에서 돌아오면 그 꼬맹이들 중 한 두명이 연필로 삐뚤빼뚤 눌러 쓴 글씨로 내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음 해에 그 마을에 또 가면 다시 아이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서로 내 손을 잡으려고 싸우고, 내 무릎에 앉으려고 싸우곤 했다.
대학 시절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그 중 쌀 배달도 있었다. 쌀 한 포대 값을 치루려면 액수가 좀 크다보니 보통 지갑에서 그만큼의 돈이 나오지 않고 어디 서랍장을 뒤지거나 하느라 돈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엄마가 그렇게 돈을 찾느라 바쁜 순간, 아이들은 낯선 사람인 쌀 배달부에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 쌀을 어깨에 이고 오느라 땀이 범벅인 내게 아이들이 다가와 뭔가 질문을 한다던가. 관찰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한번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기가 내 쪽으로 기어오다가 내 바로 앞에서 일어서더니 양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시늉을 했다. 땀에 젖은 몸으로 아기를 안으면 안 될것 같아서 웃으며 지금은 못 안아 라고 말했는데, 아기는 팔을 벌린 자세 그대로 내게 한 발 다가오다가 넘어질 것처럼 몸이 기울어졌다. 나는 급하게 아기를 붙잡아 안았다. 아기는 내게 기대어 뭔가 옹알이를 하기 시작햇다. 잠시 후에 아기 엄마가 돈을 찾아왔길래, 상황 설명을 하고 아기를 돌려주려 했다. 엄마가 안아서 받으려고 하는데도 아기는 그 작은 손으로 내 옷을 쥐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삶을 시작한 후로는 선배 활동가들의 아이들이 또 나를 엄청 따랐다. 어느 출장에 아이를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선배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3일 정도 같이 지냈는데, 3일 내내 내 옆에만 붙어 있었고, 헤어지는 날에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다.
애들 엄마가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동네 찜질방에 같이 놀러갔었다. 구석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들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인 내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인형 놀이를 했다. 그걸 보면서 당시 애들 엄마는 꽤나 놀랐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내가 전생에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얘기하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사소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은데, 정작 나는 왜 그런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기를 좋아하고, 잘 노는 건 맞는데, 단지 그 이유 만으로 낯선 아이들도 쉽게 다가오는 건 설명하기 어렵다.
아기 고양이 차차 이야기를 하다가 좀 멀리 왔는데, 어쩌면 차차도 같은 이유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다.
지인들 중에 강아지를 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들의 집을 방문하곤 하면서 고양이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아이들이 반려묘 차차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도 덩달아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며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참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와 SNS 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일상에서 저자가 찍은 고양이 사진을 자주 봐왔고, 고양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이 읽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엄청 많은 것에 비해 그들의 반려 고양이들이 그만큼 그들을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척 도도하게 행동하는 것이 고양이에게 확실히 더 어울리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