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리호]를 보다가 책 두 권을 발견했다. 하나는 장선장이 읽고 있는 [소설 영웅문]으로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을 1부 몽고(몽골이 맞는 표현이지만, 당시엔 이렇게 출간했다.)의 별로, [신조협려]를 2부 영웅의 별로, [의천도룡기]를 중원의 별이라고 이름을 바꿔 세 작품을 하나의 시리즈로 엮은 것인데, 정식으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출판한 책이 아닌 불법 판본이다. 소위 말하는 해적판.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원에서 낸 이 시리즈로 김용의 소설들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저작권료를 지불한 정식 판본이 출판된 후에도 이 고려원 시리즈를 찾는 독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화 [승리호]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책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책이다. [Leben und Lieder]라고 적혀있는데, 시집 [삶과 노래]이다. 아주 오래 전 릴케의 시집을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지금 우리집엔 시집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부산 집에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책이 나오면 괜히 반가운데, 가상의 책이 아니라 실제로 출간된 책이 나오면 더 반갑다. 특히 고려원 판 [영웅문]은 내가 읽었던(3부인 중원의 별 / 의천도룡기 부분을 읽다 말아서 완독은 아니다.) 책이고, 너무 재밌어서 몇 주간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시리즈만 읽었을 정도로 푹 빠져있었던 책이기도 해서 더욱 반가웠다.
다만 개연성을 고려하자면 이 영화의 배경이 무려 2092년이라고 하는데, 2021년 현재도 구하기 쉽지 않은 고려원 판본을 저 시대에 읽고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혹자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장선장이 해적 출신이라서 해적판을 읽는 장면을 일부러 넣은 거라는 이야기를 하던데, 그것도 억지스럽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각 나라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 언어로 말하고 각자 귀에 착용한 통역기로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한국인이라 주로 쓰는 언어는 당연히 한국어이지만, 나머지 외국인들은 무조건 영어를 쓰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언어로 말한다는 점이 재밌었다.
영화는 평을 남기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까울 정도라 별도의 평을 남기지는 않겠지만, CG는 확실히 볼만했다. 이 글을 두드리는 이유는 영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용의 무협소설들 중 저 고려원 판본 [영웅문]으로 출간된 3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이 3개의 작품들을 사조삼부곡이라고 엮어서 말하는데, 고려원이 이를 영웅문으로 이름을 바꿔 출판한 것이다. 다만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는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라서 시리즈로 엮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마지막 3부인 [의천도룡기]는 [신조협려] 시대로부터 거의 100년 가량 이후 이야기라서 시리즈로 엮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필이라고 불렸던 고 김용 선생의 작품들인만큼 재미와 감동은 당연하고 수많은 등장인물들 간의 얽힌 관계들을 따라가며 읽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또 역사상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재미를 더한다.
이 긴 이야기에는 등장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익숙하지 않은 중국 이름이라 더 헷갈려서 두 번째 읽을 때부터는 공책에 각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을 기록해두고 읽기도 했다. 이 방법은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대망]을 읽을 때 유용했다. 일본 이름은 길고 어렵기도 하고, [대망]의 등장인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꾸 이름을 바꾸곤 해서 정말 읽기가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책장에서 세로 판본의 [대망]을 야금야금 꺼내 읽다가 중단하고, 또 한참 후에 다시 처음부터 꺼내 읽기를 반복해서 앞 부분만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포기와 재독을 반복했는데, [후대망]까지 전부 다 읽겠다는 다짐을 결국 이루지는 못했다.
그에 비하면 이 [영웅문] 시리즈는 [의천도룡기]를 제외하면 한 번에 쭉 다 읽었다. 확실히 일본 이름과 문화보다는 중국 이름과 문화가 더 익숙했던 것 같다. [사조영웅전]은 두 번 읽었고, [신조협려]는 한 번 읽었으며, [의천도룡기]는 다 읽지 못했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의천도룡기]의 앞 부분까지 읽다가 바쁜 일이 생겨 중단했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처음부터 다시 다 읽어야지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사조영웅전]까지만 다 읽고 중단해서 [사조영웅전]만 두 번 읽게 되었다.
대학시절에 읽었기 때문에 [신조협려]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양과와 소용녀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든 면도 있고, 소용녀라는 미녀 캐릭터에 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상상 속에서 소용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중에 유역비가 소용녀 역을 맡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 상상 속의 소용녀를 드디어 현실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다.
이 세 소설들은 중국과 대만에서 여러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시간이 나면 이 드라마들을 다 보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다시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 보다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한 후 집에서 회복하는 기간 동안 드디어 시간이 났다. 책을 읽다가 말아서 결말을 알지 못하는 [의천도룡기]가 가장 궁금해서 그 드라마부터 시작했다. 제작연도에 따라 여러 드라마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제작한 2019년 판을 보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판이라 확실히 CG나 풍경이 볼만했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남녀 모두 미모가 빼어났다. 조민 역의 진옥기와 주지약 역의 축서단도 아름다웠지만, 개인적으로 소소 역의 허아정이 특히 좋았다. 작중에서 소소가 부르는 노래를 특히 좋아해서 지금도 유튜브로 자주 듣는다.
드라마 [의천도룡기]를 다 보고나서 2017년 제작한 [사조영웅전]을 보기 시작했는데, 35편에 달하는 드라마를 쭉 이어 보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다. 한 20편 정도까지 보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사조영웅전]을 다 보고나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유역비 주연의 2006년 판 [신조협려]를 보려고 했는데, 결국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일터에 복귀하고 말았다. 즉, 다시 장기간 일을 쉬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앞서도 말했듯, 20대 젊은 시절에는 [신조협려] 이야기가 가장 끌렸다. 그에 비하면 [사조영웅전]은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책으로 다 읽지 않아서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의천도룡기]도 이야기는 [사조영웅전] 보다는 흥미로운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다시 이 세 소설들을 비교해보면 [사조영웅전]의 이야기에 더 끌린다. 아니 이렇게 비교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겠다. [신조협려]의 양과는 나중에 훌륭한 신조협으로 성장하지만, 그 성격과 행동을 보면 주인공으로서 좋아하기 어렵다. 20대에 읽었던 당시에 비해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갖은 고난을 겪으며 절대고수로 성장하지만, 특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몰입을 하다가도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역시 주인공으로서 매력이 떨어진단 이야기. [사조영웅전]의 곽정 역시 온갖 시련을 겪으며 고수로 성장해가는데, 답답하고 우직한 면이 부각되는 인물이다. 20대에 읽을 당시에는 그 답답한 면 때문에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면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곽정의 그런 단점은 작중에서 황용이 아주 훌륭하게 잘 보완해준다. 두 사람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그래서 [신조협려]의 소용녀와 [의천도룡기]의 조민과 비교해봐도 보다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느껴진다. 사실 조민은 많은 부분에서 황용의 이미지가 겹쳐지긴 하지만, 황용이 곽정과 더불어 적정 선을 반드시 지키는 것에 비하면 조민은 대놓고 선 반대편에 있다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쪽으로 넘어온다는 점이 다르다. 소용녀는 특유의 백치미와 미모로는 이 세 소설들의 등장인물들 중 최고라는 느낌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놓고 봤을 때의 비중이나 이야기를 끌고가는 면에서 보면 황용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원 판 [영웅문]을 열심히 읽었던 때가 20대 중반 좁디 좁은 자취방에서 몇 달간 두문불출하며 소설을 쓰던 시기였다. 신춘문예를 거쳐 소설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래서 정말 골방에 처박혀서 하루종일 읽고 쓰기만 집중했었다. 그렇게 불태워봤기 때문에 나중에 후련하게 포기할 수도 있었다. 결국 단편 몇 개를 겨우 완성하고 중편을 쓰다 말고 결국 소설쓰기를 중단했다. 재능이 없다고 느꼈고, 경험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더는 소설에 집착할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만약 그 정도로 집중해보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할 수도 있을거야 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계속 헛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암튼 그 당시에 나는 이 [영웅문]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나중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대하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두어 개의 이야기를 구상했었다. 그 중 하나는 지금도 가끔 머리 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언젠가 다시 골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이 이야기를 꺼내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