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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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에 도착했다. 난 문제없이 해냈다. 지금껏 멀리서만 봤던 오두막이 몇 걸음 앞에 보인다. 저 멀리 남편과 내 아이들의 모습이 까마득하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호수를 건너자 내가 알던 호숫가는 건너편이 되었다. 이쪽이 저쪽이 된 것이다. (중략)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13쪽)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18쪽)

많은 열정적인 관계가 그렇듯 이탈이어에 대한 내 열광은 애착,집착이 될 터였다. 이성을 잃은, 응답받지 못하는 뭔가가 늘 존재하겠지. 난 이탈리어와 사랑에 빠졌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내게 무관심하다. 이탈리어는 날 절대 갈망하지 않은 거였다. (22쪽)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추방에 익숙해져 있다. 모국어인 벵골어는 미국에서 보자면 외국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살아갈 땐 계속 기묘하고도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25쪽)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외부에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더는 사전이나 메모장, 펜이 필요 없는 날을 꿈꾸고 살아야 할까? 내가 영어로 책을 읽듯이 도구 없이 이탈리아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꿈꾸어야 할까? 이런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게 옳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많아도 나는 아주 활동적이고 열심인 이탈리아어 독자면 족하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42쪽)

하지만 메모장에 단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나는 모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다. 필요할 때 단어를 퍼 올리고 싶다. 단어에 닿고 싶다. 단어들이 내 일부가 되게 하고 싶다. (47쪽)

자신에 대한 믿음과 권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작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73쪽)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중략) 나는 글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심오하고 자극적인 형식으로 언어를 익히고자 하는 내 방법일 뿐이다. (75쪽)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도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76쪽)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극복할 수 없다. 겨우 두 걸음 나아가는 데 내 인생 절반이 소요됐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건너고 싶었고 깊은 성찰의 물꼬를 튼 작은 호수의 은유는 틀렸다. 사실 언어는 작은 호수가 아니라 넓은 바다다. 두렵고 신비한 요소,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연의 힘이다. (79쪽)

그들이 왜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벽이 있다.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날 무시할 수 있다. 날 벼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날 바라보긴 하지만 진정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 말을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사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노력을 귀찮아 한다. 때때로 내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말을 할 때 건드려선 안 되는 물건을 건드린 아이처럼 비난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중략) 언어는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 나라 말을 모르면 자신이 인정받는 당당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113-114쪽)

변신의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삶의 유일한 요소일지 모른다. 모든 개인, 나라, 역사의 시대, 우주만물의 과정은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격렬한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린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예술은 우리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길 뜻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 걸까?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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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십계'에 대한 열명의 고찰이다. 그런게 있지, 하면서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입으로 떠든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을 모르면 안되는 것처럼, 하지만 누구라도 깊이 묻을라치면 내 생각보다 어디서 들은 중언부언으로, 때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곤 했다. '십계'도 각 단어와 문장으로 알면서 그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의 역할을 다 했다(?), 그런 식이었다. '십계'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풀어 보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비인간에게조차, 함께 존재론적으로 살기 위하여,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공존하게 하는 공동체 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참말을 해야 한다. 탐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태로 몰아가는 시스템을 인지하고 드러내야 한다. 개인의 역할과 구조적 시스템 간의 간극, 강자와 약자라는 이분법 사고 벗어나기, 이러한 글은 많이 낯설다. 내가 구축한? 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요즘 꼬리를 무는 클럽발 코로나, 정의연, 무뇌와 똥개, 참말은? 등

오랫만에 오남매가 같이 어버이날에 모였다. 영원한 어린이라는 나의 생일도 축하하면서, 부모님은 내년에도 또 이같이 하자고, 당신이 그때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매달 찾아뵙기로 마음은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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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김진호 외 9인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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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법은 과거의 주체들인 ‘조상‘이 아니라 현재의 주체들인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그 법의 표현들은 [출애굽기]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그 법은 과거의 법이 아니라 현재의 법이다. 즉 그 법령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의미는 현재의 경험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을 성찰하게 한다. 신이 바로 그런 현재의 사람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법률을 말하고 있다. (10쪽)

‘하나‘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유일신론과 범재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는 사실상 ‘전체‘이자 ‘근원‘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37쪽)

문득 나는 제2계명에 대한 데리다식 독법이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영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를 교리적.교조적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찾을 수 있어?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의심의 해석학 내지는 "틈과 균열의 존재론으로 신을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묘한 충동으로 말이다. (43쪽)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성의 기준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이른바 ‘생산적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영국적으로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머물게 하며 이들의 희생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ㅣ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 과정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 의미를 되찾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73쪽)

많은 아이가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인 부모를 통해 가정 안에서 최초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4계명이 절대 계명으로 수직적으로 선포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유해함... (101쪽)

결국 무수한 실존적 자살이 야기한 담론 현상들을 진지하게 해석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한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살을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 틀로만 바라봄으로써 수많은 자살의 실제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중략) 즉 교회와 신학은 낡고 경직된 자살교리의 옷을 벗고 사회를 직시하면서 자살을 이해함으로써 제5계명의 재해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117쪽)

막강한 힘을 가진 가부장들의 ‘질투심‘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보고, 통제하기 어려운 사적 복주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간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다시 말해, 제6계명은 개인적 차원에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통해 다뤄졌던 ‘간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메커니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읽을 수 있다. (136쪽)

고대 이스라엘에서부터 이미 그러했듯이, 십계명은 개인들의 집합적 공동체 내지는 인간들이 맺는 미시적. 거시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사회‘ 그 자체에 주어진 집단적이고도 제도적인 수준의 개혁 요구다. 제7계명을 포함한 십계명 전체는 인간을 소외된 존재, 즉 노예화된 삶으로 유인하는 이스라엘의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개혁하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165쪽)

정의를 ‘법의 말‘을 통한 통치, 곧 법치와 동일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는 "법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한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던진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하는 정의는 ‘법의 말‘을 통한 주권자의 현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수사로 전락할 뿐이다. (중략)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180-181쪽)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 제도가 개개인에게 안정성과 의미를 주었지만, 21세기는 무한 경쟁이 삶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절이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대체되고 버려지는 세상에서, 이제 경쟁력 있는 삶의 형태는 ‘개인‘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가족이 있다는 것, 내가 돌봐야 하고 재화를 나눠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불리한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201쪽)

10개의 계명 안에 탐욕 금기가 들어있다. 선민을 자처하던 이스라엘은 지켜야만 했던 금기가 많았다. 제의와 음식 금기를 비롯하여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짓는 다양한 실천은 열 계명 속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중요했다. 그럼에도 이를 대신하여 탐욕 금기가 들어간 것에는 어떤 함의가 있을까. 탐욕이 지배 문화가 될 때 공동체가 즉각 붕괴됨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지금 여기, 이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탐욕이 퍼져 있다. 탐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종교 공간마저도 욕망의 지배를 받은 지 오래다. (223쪽)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상호작용하는 에코시스템의 원리처럼 인간은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서로의 관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러한 삶이 바로 ‘존재로 사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관계성의 구조를 인간 공동체라는 담을 넘어 지구의 모든 존재에게로 확장하는 지점에 서 있다.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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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팀'으로 사전에 나와 있다. 현재 누리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에 굴하지 않고 더 누리고 더 가지려 하는 게 어려울까, 버리고 나눠주는 게 더 쉬울까... 아무튼 어떻게 하든 저항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열째 계명의 일맥 상통함으로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하루의 온전한 쉼도 물론 중요하지만 삶의 전반적인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우상숭배(첫번째 계명)와 탐심(열번째 계명)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는 우리를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내몰고 있고, 재물과 소유에 의존하게 하고, 그러려면 경쟁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타인의 것을 당연하게 뺏도록 만든다. 장애가 있든, 인종이 다르든, 가난한 자든, 노동자든 등등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누구도 배제되는 일이 없이, 모두가 연대하도록 하는 자세를 배우게 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핵심이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이웃의 것을 뺏을 수는 없는 일이니... 굴하지 아니하고 거역하고 버티기가 어려운 일이다. 5월인데 벌써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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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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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안식일은 거룩한 정지 기간이요. 몸과 영혼의 무위를 계발함으로써 신성함을 계속 이어 가는 기간이다. (13쪽)

불안이 야기하는 무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대의 정황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저항이요 대안인 행위다.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는, 이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다. (16쪽)

‘새롭고 발전된‘ 생산품, 끊임없는 스타일 진보, 그리고 늘 새로운 기술은 옛것을 소유함을 부적절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결국 상품이라는 여러 잡신을 만족시킬 노력을 끝없이 하게끔,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다. (42-43쪽)

우리는, 우리의 경제 영역이나 우리의 인간관계나 우리 삶의 어떤 영역세서나, 바쁨과 탐욕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함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 삶의 본질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73쪽)

생산과 소비가 정의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생산과 소비에 큰 차등이 있으며, 따라서 가치와 중요도에도 큰 차등이 있다. 이런 사회 시스템에서는 모든 이가 생산자와 소비자 역할을 잘 수행하라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라고 -강요당한다. (87쪽)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요. 모세가 열거한 율법을 넘어서는 관대한 편입 행위이며, 하나님 소유인 이스라엘이 누리는 생명이 이전에는 제외당했으나 이제는 환영받는 이들에게도 부어지게 만드는 행위다.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그들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안식일을 골랐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외부인을 받아들일 공동체 구성원들은 안식일을 구성원이 되려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유일한 특별 조건으로 만들었다. (112쪽)

나아가 우리는 솔로몬이야말로 언약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무시한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던 상품지상주의와 쉼이 없음을 상징하는 화신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124쪽)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그와 동시에 많은 일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야훼를 예배하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생식의 신이요. 언약에 따른 의무나 언약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신인 바알을 신뢰하고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스사엘이 이렇게 두 마음을 품는 바람에 안식일은 거짓 안식일이 되어 버렸으며, 실제로 언약에 맞서는 실존과 함께 나타나는 끝없는 불안때문에 진정한 노동 중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거짓 안식일은 아무럼 쉼도 제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서 철저히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128-129쪽)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기는 불가능하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동시에 사업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려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136쪽)

안식일의 쉼은 탐욕스러운 획득 행위를 그만둠으로써, 여러 사회관계를 무너뜨리고 왜곡하는 쉼이 없음에서부터 이웃이 살아갈 공간과 그의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43쪽)

힘 있는 자들이 약자의 것을 원하고 빼앗는 행위는 모든 이에게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 주신 창조주가 그어 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가는 행동이다. (153쪽)

첫째 계명이 거부하는 우상 숭배와 열째 계명이 거부하는 탐심을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우연이자,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우상 숭배와 탐심이라는 두 가지를 동일시한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물건,특히 금과 은을 부어 만든 물건들을 예배하는(높이 여기는) 것이다. (중략)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말하는 탐심은 이웃을 희생시켜 가며 재물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두 가지를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요.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이웃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실체를 꾸준히, 훈련받은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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