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품절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예상치 못했던 진지함과 엄숙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쉰일곱 살에 나는 늙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일흔네 살이 되니 그때보다 훨씬 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당신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당신과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공유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6쪽

도시에서 산다면 대도시, 그것도 제일 큰 도시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당신이 외딴 전원과 광대한 도시의 양극단을 다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 다 당신에게는 무궁무진한 것 같았지만, 소도시와 작은 마을들은 너무 빨리 바닥이 드러나 버리는 것 같고 결국 더 이상 관심을 사로잡지 못했다. -97-98쪽

과거에도 시신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시신, 더는 살아 있지 않은 몸을 에워싼 비인간적인 정적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시신들 중 당신 어머니의 것은 없었다. 그중 어느 시신도 당신의 생명이 시작된 몸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머니의 시신을 슬쩍 보고는 곧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131쪽

뭔가 얘기를 하려면 안에서, 당신의 안에서, 축적된 기억과 당신이 몸에 계속 지니고 다니는 인식들로부터 끌어내어야만 한다. -144쪽

새벽 3시에 생각이 과거로 흘러가면 대개는 어두운 쪽이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당신을 사로잡는다. 잠들 수 없는 밤이면 그 기억으로 되돌아가 그날의 사건들을 반복하거나 나중에 느꼈던 수치감, 그 후로 계속 느껴 온 그 수치감을 다시 느낀다. -184쪽

기억하기에 휠체어를 탄 학생은 없었지만 몸이 뒤틀리고 꼽추였던 남학생과 한 팔이 없는 여학생(어깨에 손가락이 없는 살덩이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셔츠 앞섶에 침을 질질 흘리던 남학생, 키가 난쟁이만 한 여학생은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와서 그때를 되돌아보면 이런 아이들은 당신의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였다. 그들의 존재가 당신의 삶에 없었더라면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깊이도 연민도, 고통과 역경의 형이상학에 대한 통찰도 없이 빈곤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도 열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던 영웅적인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207-208쪽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당신을 아내의 가족과도 결혼했다. 당신의 장인 장모는 아내가 자란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핏속으로 다른 나라가 점차 스며들어 왔다. -218쪽

[누가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문장에, 특히 괄호 속의 말에 감동한다. 그 말을 보기 드문 세심한 정신,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 특히 나이든 사람, 노쇠해져서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보여 준다. (할 수밤 있다면.) 어쩌면 그 마지막이 고통스럽건 고통스럽지 않건 마지막에 가서 사랑스러워진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성취는 없을지도 모른다. -231-232쪽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되는 곳이다. 당신은 단어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언제나 걷고 있다.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당신의 심장의 리듬, 심장의 박동이다. -241쪽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당신의 맨발. 당신은 예순네 살이다. 바깥은 회색이다 못해 거의 흰색에 가깝고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당신은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문이 닫혔다.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당신은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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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쫓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p164)"

스티브 도냐휴라는 사람은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글에서 사막. 그중에서도 사하라와 인생을 오버랩시켜 설명하고 있다.

 

북아프리카를 글로서 만났다. 알제리.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를 마음으로 다녀왔다. 그 곳을 그림, 소설, 영화 속 장면과 같이 잔잔히 들려준 이야기는 소설을 영화를 그림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눈부신 햇살의 이방인 속 장면도,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동굴도, 그녀들의 히잡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모스크 돔에서도, 사막조차 아름답다... 요란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으면서, 적절하게 담담하게 조용하게 읽으면 된다. 그러면 어느새 눈부신 태양도 만나게 되고, 깊고 깊은 사막을 건너게 되고, 튀니지언 블루의 바다를 보면서 갓 따온 커피도 맛보게 되고, 마조렐 정원도 걷게 된다. 음, 이맛이야하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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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기행 5 - 북아프리카 사막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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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면 내 안에서 발버둥치던 자아가 비행기의 상승과 함께 상승하고, 비상과 함께 비상하는 느낌이 든다. 인류사의 허다한 영적 스승들이 '길과 깨달음'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고정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행로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비행기를 타는 일은 우선 그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이고말고다. 나와 다른 피부색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머리 모양을 하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속으로 섞어드는 순간, 나의 자잘한 자의식의 서푼짜리 고뇌의 뿌리를 이루는 무지며 의식의 한계 같은 것이 서서히 보이고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21쪽

그(존 버거)에 의하면 '떠남'은 "예언의 시간"이며 "영원한 새벽"을 맞으러 가는 일이고 "내가 태어난 마을을 들이마시며" "그 강의 굴곡을 어루만지는"일이다. 무엇보다 "아주 오래된 산맥보다도 더 오래된 가슴속의 꽃 한 송이" 피어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사람들이 고향 혹은 그와 비슷한 시간 속의 옛 장소를 찾아가려 하는 것도 단순히 추억이나 과거를 그리워해서만은 아닌 "사라진 것을 기려 말을 걸게 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말을 걸어서 산맥보다 오래된 가슴속의 꽃 한 송이가 계속 피어 있게 하기 위함이다. -63쪽

모든 종류의 옳고 그름은 종교적 분파나 구별보다는 그 조준경이 자연과 우주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로서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색에서부터 출발함이 옳다고 한 것이다. 죄가 나쁜 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기 때문에보다는 이 자연과 우주의 척도로 볼 때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관점 때문에 기본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기본, 내가 챙겨야 될 것은 신앙의 노선이나 색깔이 아니라 기본이었던 것이다. 그 영구적인 자연과 우주의 렌즈로 비춰보는 기본 말이다. -10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미술은 아름답다. 모든 덧없음과 허무와 슬픔을 이겨내게 하는 혹은 잊어버리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거대한 아름다움이고 숨이 멎는 아름다움이다. 보라. 신전의 벽화들마다 원근법과 공간감이 얼마나 과감히 무시되고 있는지. 원근이나 공간은 예컨대 시간과 거리에 관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만난다면 그런 시각법은 유치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시간을 이겨내고 공간 또한 주물러댄 이집트 미술은 위대하다. -146쪽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대체 무엇이 실존이고 무엇이 허구이며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이란 말인가. 수많은 인간들이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실존이고 실상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순간에 무너질 허상 일 수 있지 않을까. 사하라는 내게 그런 묵시 같은 느낌을 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실존과 허상의 경계 같은 것을 갖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159쪽

내가 좋아하는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소외와 두려움에 대한 불안이 녹아 없어져버리는 상태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불안을 덮는 대신에 자신을 놓아버리거나 잃어버리는 대가 또는 기꺼이 치러야 할 것이라고. 그런 면에서 소외와 죽음.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의 어둠과 맞서 싸워가며 불빛을 찾을 만한 의지가 허약할수록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흡수시키면서 쉽게 사랑에 빠져드는 것 같다. 여린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듯 그렇게 말이다. -250쪽

어느 문화권이든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면 박제된 박물관보다는 재래시장으로 가라고. 그중에 제일은 페스의 이 미로 시장이라고. 물건을 팔기보다 시간을 파는 수크의 모래시계 장터에서 느리게 걸어보라고.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일수록 그 미로 속에서 다시 길을 찾아 나설 일이라고.-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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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그냥 있는 거로 알았다. 편하면 편리한대로, 눈에 거슬리면 그런대로, 불편하면 웅얼웅얼 한 마디 뱉고 지나쳤었다.  '빨간도시'는 저자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조금 고통스러웠다. 불편한 건물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거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그 행간사이에는 무한대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까지 막아버린 사람들의 무식하고 가히 폭력적이라 할 내용들 때문에 불편했다. 특히, 눈에 거슬리고 불편하고, 눈을 아프게 하는 부조화의 건물들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건축 또한 자연과 사람과 같이 동화되어 편한 옷 같아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바탕은 사람이 먼저여야 했다. 거기에 높고 힘있고 돈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사람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건축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롯히 시대상, 사회, 사람들의 태도까지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자리에 있다. 그곳의 건축은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본이 되기도 하지만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사람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 있을 건축은 그래서 정의롭게 공정하게 되어져야 한다. 건축가가 본 곳곳의 건축은 일반인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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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 - 건축으로 목격한 대한민국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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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서의 학교가 증언하는 것은 교육의 철학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훈육과 처벌을 교육의 방법으로 채택했다면, 아니 일제 강점기에 채택된 것을 이어받았다면 이 캘리포니아의 학교 배치는 작은 사회 체험을 교육 방법으로 선택했음을 증언한다. -36쪽

깨끗하고 정돈된 내부가 아니면 투명한 건물을 자신 있게 만들 수 없다. 도시의 관점에서 본 투명한 건물은 그래서 건강하다. 내부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도시를 그만큼 활력 있게 만든다. -50쪽

문화는 밥과 반찬처럼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작심하고 다가가야 할 순례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인 우리 문화의 모습이다. -85쪽

건축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존재한다. 건물이 일상의 소비재가 아니고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적 환경이라는 가치관이 건축을 의미 있게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이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 의식이기도 하다. -115쪽

도시는 건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설, 음악, 영화에 담긴 도시의 모습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시가 지닌 문화적 자산들이고 도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들이다. -122쪽

우리의 도시에서 역사는 어디에 있느냐고들 묻는다. 관광 엽서의 사진처럼 도시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의 가치는 건물만이 아닌 문화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123쪽

즉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이 즐겁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의 도시를 만들어야 외부인들에게도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191쪽

도시 구석구석에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감춰질 수 있는 곳을 없애는 것이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높은 담장을 쌓는 것이 아니라 담장을 없애는 것이 범죄를 막을 수 있다. 가로등도 차도뿐만 아니라 인도의 구석을 비출 수 있도록 별도로 마련되어야 한다. -214-215쪽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가 알아서 스스로의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불필요한 장애물을 만들지 말고 자유롭게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는 마당만 만들어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이다. 사고의 자유, 지성의 자유.-261쪽

말과 글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보다 글이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한국 말과 한글 사이의 특수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말과 글 사이의 간극을 좁히면서 그 품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건강한 사회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인의 집단이 문화적으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273쪽

나는 공정한 게임의 존재를 믿는다. 그 사회적 모습은 분배에 있다. 늘어난 생산력이 진보의 모습이라면 그 결과물을 어떻게 나누는가는 정의의 모습이다. 인간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고안해낸 가치개념이 선이라면 인간능 악하게 태어나고 이 사회에는 만민에 대한 늑대들이 가득 차 있다. 그 늑대는 틈이 나면 언제나 사회를 장악하려고 하고 거기 저항해내는 힘이 정의에 대한 신념이다. 태어날 때 가지고 나는 것보다 정직한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하고 그 노력에 의한 경쟁이 공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 구성원의 책임일 것이다. 이 사회는 정의롭지 않고 완전히 정의로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좀 더 공정하게 만들려는 구성원의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의 정의롭지 못한 모습은 물리적으로 표현되어 도시에 깔린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보다 그렇지 않아도 좋을 곳에서 필요 이상의 대접을 받는 도시는 잘못되어 있다. 때로는 뻔뻔스럽게 드러나고 때로는 교활하게 숨어 있는 그 모습을 나는 애써 찾아내고 싶다.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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