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예상치 못했던 진지함과 엄숙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쉰일곱 살에 나는 늙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일흔네 살이 되니 그때보다 훨씬 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당신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당신과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공유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6쪽
도시에서 산다면 대도시, 그것도 제일 큰 도시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당신이 외딴 전원과 광대한 도시의 양극단을 다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 다 당신에게는 무궁무진한 것 같았지만, 소도시와 작은 마을들은 너무 빨리 바닥이 드러나 버리는 것 같고 결국 더 이상 관심을 사로잡지 못했다. -97-98쪽
과거에도 시신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시신, 더는 살아 있지 않은 몸을 에워싼 비인간적인 정적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시신들 중 당신 어머니의 것은 없었다. 그중 어느 시신도 당신의 생명이 시작된 몸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머니의 시신을 슬쩍 보고는 곧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131쪽
뭔가 얘기를 하려면 안에서, 당신의 안에서, 축적된 기억과 당신이 몸에 계속 지니고 다니는 인식들로부터 끌어내어야만 한다. -144쪽
새벽 3시에 생각이 과거로 흘러가면 대개는 어두운 쪽이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당신을 사로잡는다. 잠들 수 없는 밤이면 그 기억으로 되돌아가 그날의 사건들을 반복하거나 나중에 느꼈던 수치감, 그 후로 계속 느껴 온 그 수치감을 다시 느낀다. -184쪽
기억하기에 휠체어를 탄 학생은 없었지만 몸이 뒤틀리고 꼽추였던 남학생과 한 팔이 없는 여학생(어깨에 손가락이 없는 살덩이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셔츠 앞섶에 침을 질질 흘리던 남학생, 키가 난쟁이만 한 여학생은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와서 그때를 되돌아보면 이런 아이들은 당신의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였다. 그들의 존재가 당신의 삶에 없었더라면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깊이도 연민도, 고통과 역경의 형이상학에 대한 통찰도 없이 빈곤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도 열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던 영웅적인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207-208쪽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당신을 아내의 가족과도 결혼했다. 당신의 장인 장모는 아내가 자란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핏속으로 다른 나라가 점차 스며들어 왔다. -218쪽
[누가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문장에, 특히 괄호 속의 말에 감동한다. 그 말을 보기 드문 세심한 정신,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 특히 나이든 사람, 노쇠해져서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보여 준다. (할 수밤 있다면.) 어쩌면 그 마지막이 고통스럽건 고통스럽지 않건 마지막에 가서 사랑스러워진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성취는 없을지도 모른다. -231-232쪽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되는 곳이다. 당신은 단어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언제나 걷고 있다.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당신의 심장의 리듬, 심장의 박동이다. -241쪽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당신의 맨발. 당신은 예순네 살이다. 바깥은 회색이다 못해 거의 흰색에 가깝고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당신은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문이 닫혔다.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당신은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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