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읽었다. 한여자를 만나 헤어지기까지의 긴 편지글을 감정이입하여 읽었다. 타인을 사랑하여 오래동안 함께 사랑하며 보내기 위해서는 시간도 공간도 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적절하고 적당한 거리가 어디쯤일지는 순전히 서로의 타이밍이다. 내가 네가 원하는 소통의 시간에서 불일치감을 느낄 때, 그때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서로에게 자리 잡았다고 하면 될까. 익숙과 편안이 자리 잡으면 더 더욱 서로를 돌아봐야 할 때라는 거. 네가 안주한 자리가 축축하지는 않은지. 다시 자리를 만들어야 하진 않은지. 나의 눈에서 너의 위치가 익숙해진 게 아니라 너의 마음의 자리를 살필 때가 된 거라는 거. 그래서 불필요할 만큼 사랑해를 반복해 말하고 들려줘야 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여전히 연결된 상태로 있기 위해서는. 마음을 보여 주는 연습도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보여주냐구. 말이나 행동으로... 그리 무덥더니 한줄기 비가 온다. 불가능한 약속을 가능하게 만드는 말, 부단히 끈덕지게 반복해야 영원까지 닿을 수 있는 말, 사랑해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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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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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추억이 쌓이면 비의를 품은 시간이 당신과 내게 어떤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식물 얘기를 하셨지만 사람 관계는 화분을 키우듯이 가져가야 하낟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 관계야말로 인위적인 힘을 허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둘 사이로 희미하게 빠져나가는 시간이 그때마다 던져주는 의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의 이름으로 무언가각 불현듯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식물에 꽃이 피듯. (58쪽)

베토벤은 귀가 멀고 밤에 자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눈이 멉니다. 더구나 옆에 여인이 잠들어 있으면 사내들은 필시 눈이 멀고 귀가 멀게 됩니다. 생은 그런 것입니다. 눈 귀가 멀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게 한편 삶이라는 걸 어느 날 섬광처럼 깨닫게 됩니다. 혼자일지언정 때로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03-104쪽)

타인과 타인이 만나는 일은 빛과 같은 속도로 은하를 몇 개나 건너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하나의 우주이며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113쪽)

언젠가는 그대와 나도 헤어지게 될는지. 하지만 섬 사이엔 늘 밀물이 들어차곤 하니까 다음 사랑으로 다시 또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오는 오색의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광화문에서 참으로 여러 번 만났군요. 그때마다 광화문은 바다였는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세상의 넓은 바다와 그 많은 섬들. (172쪽)

어제오늘의 생이 또 내게는 정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당신도 꿈이었을까. 언제든 길을 가야 하는 어느 속절없는 사내의 꿈속에 나타난 정령이었을까. (201쪽)

오후 네시에 적막 속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달걀처럼 따뜻하고 매끈한 당신의 이마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마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안도감에 젖어 있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불가해한 당신의 그 뒷모습.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만져지지 않던 그 완강한 존재감. 부동의 한 존재를 그처럼 뒤에서 눈여겨보며 나는 어느덧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영상들은 대개 다 당신에게 투영된 다름이고 이제 남은 것은 곧 꺼져버릴지도 모를 나에 대한 희미한 존재감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익숙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안심하기 위하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다투고 있어야만 하고 더이상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면 한번쯤 떠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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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이 자신을 해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많은 나쁜 속성이 있음에도 나빠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을까..란 문장이 맴돈다. 파괴되는 사람은 자신의 나쁨으로 인한 게 아니라 타인으로 인해 그렇게 되는 걸까. 아님 자기 기준이 높아 스스로 나빠지기로 결정한 걸까.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은 멀리있고. 온 힘을 다해서만 한마디 발화할 수 있고, 희미한 모습이나마 볼 수 있다. 그녀와 그가 지나온 각자의 지난한 세월에서 그들을 비껴간 사람들의 간간한 사건들은 그녀의 언어를 뺏아가고 그의 볼거리를 앗아갔다. 각자의 눈과 입이 되어 줄 수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사랑의 출발점이 되는데 그건 모를 일이다. 서로의 결핍이 이끄는...---한때 눈멀고 귀멀어 오직 그 사람과 그 일만 있었을 때가 그립다. 사랑해하면 될 말을 표현하기 위해 몇번이나 망설이고 입안의 말을 다듬고 했던, 결국 엉뚱한 이야기로 오해와 이별을 했던. 아무말도 하지 못해 그냥 보냈던. 그때가 그립다.   

한강의 글은 세심하다. 마음의 지도를 세세하게 그려내고 세포하나에 담긴 느낌까지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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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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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여름 밤 내 책상 옆의 작은 거울 속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설픈 수화를 연습하는 내 상반신이 비쳐 있었지만, 거기 어른어른 겹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나는 매순간 알아보았습니다. (45쪽)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48쪽)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우리가 그토록 연하고 부서지기 쉬웠을 때, 지구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옮겨다닐 때,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달걀, 같은 흙반죽에서 나온 두 개의 도자기 공 같았지. 네 찌푸린 얼굴, 우는 얼굴, 깔깔 우는 얼굴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부서지며, 가까스로 무사히 모아 붙여지며 흘러갔지. ((80-81쪽)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105쪽)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112-113쪽)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음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여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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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각과 색깔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을 배워도 글이 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모를 때다. 자신을 알아야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기답게 표현할 수 있다. 유시민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글이 온순하고 유순하다. 읽는이도 편안하다. 물 흐르듯이 읽으면서 끄덕 끄덕했다. 모르면 넘어가고 다르면 그렇구나하고 또 넘어갔다. 

2. 주말에 카페 알바를 해보니 커피와는 15, 나머지 85는 설겆이, 재료준비, 그릇배치, 청소와 뒷정리다. 잔잔한 호수 위의 백조 같다. 그 잠깐에서 '우리 커피 만들어 먹자'하는 순간이 참 좋다. 그 말에 무장해제가 된다. 나의 쓸쓸과 너의 슬픔이 만나는데 커피가 있어 선뜩 들어가기 어려운 문에서 스르르 자동문이 된다. 타인과의 연결에서 커피로 가늠한 적이 있다. 서로가 알게 되면 생면부지의 일까지 만나게 된다. 아는만큼 보이고 알아야 사랑하게 되니까. 관계의 너비가 겹쳐지면, 커피는, 커피마셔야지, 커피마시자, 맛있는 카페가자...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 잡는데는 적어도 수천시간은 필요하다. 커피는 기호품이기에 생필품이 고루 갖춘 다음에야 오니까. 나에게는 우선 순위지만... 커피를 주문한 이에게 꾹꾹 눌러 담아 줬다. 

3. 한강의 시 몇편을 읽었다. '오이도'를 읽으며 나의 ***날들이 남겨진 까마귀 귀같은, 내맘에 봉인된 섬에 다녀왔다. 청춘이 그립고 그리웠다. '서시'는 영화 '세가지색 블루'와 맞 물린다. 지금 여기에서 보는 당신, 만진 얼굴이 내가 아는 당신과 다를 수 있다는 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거. 그러면서도 그늘과 빛이 만든 얼룩에 숨어 있고 싶기도 했다는 거. 푸르디 푸른 슬픔의 빛을 통과하고서야 자유를 얻게 되고 치유가 되고. 누군가를 안다는 건 나를 제대로 알기 전에 모른 다는 거. 그래서 모든 건 너가 아니라, 너의 이유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나의 동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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