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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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좀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추억이 쌓이면 비의를 품은 시간이 당신과 내게 어떤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식물 얘기를 하셨지만 사람 관계는 화분을 키우듯이 가져가야 하낟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 관계야말로 인위적인 힘을 허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둘 사이로 희미하게 빠져나가는 시간이 그때마다 던져주는 의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의 이름으로 무언가각 불현듯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식물에 꽃이 피듯. (58쪽)

베토벤은 귀가 멀고 밤에 자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눈이 멉니다. 더구나 옆에 여인이 잠들어 있으면 사내들은 필시 눈이 멀고 귀가 멀게 됩니다. 생은 그런 것입니다. 눈 귀가 멀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게 한편 삶이라는 걸 어느 날 섬광처럼 깨닫게 됩니다. 혼자일지언정 때로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03-104쪽)

타인과 타인이 만나는 일은 빛과 같은 속도로 은하를 몇 개나 건너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하나의 우주이며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113쪽)

언젠가는 그대와 나도 헤어지게 될는지. 하지만 섬 사이엔 늘 밀물이 들어차곤 하니까 다음 사랑으로 다시 또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오는 오색의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광화문에서 참으로 여러 번 만났군요. 그때마다 광화문은 바다였는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세상의 넓은 바다와 그 많은 섬들. (172쪽)

어제오늘의 생이 또 내게는 정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당신도 꿈이었을까. 언제든 길을 가야 하는 어느 속절없는 사내의 꿈속에 나타난 정령이었을까. (201쪽)

오후 네시에 적막 속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달걀처럼 따뜻하고 매끈한 당신의 이마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마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안도감에 젖어 있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불가해한 당신의 그 뒷모습.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만져지지 않던 그 완강한 존재감. 부동의 한 존재를 그처럼 뒤에서 눈여겨보며 나는 어느덧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영상들은 대개 다 당신에게 투영된 다름이고 이제 남은 것은 곧 꺼져버릴지도 모를 나에 대한 희미한 존재감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익숙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안심하기 위하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다투고 있어야만 하고 더이상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면 한번쯤 떠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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