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하버드 석학 하비 콕스의 바이블 가이드
하비 콕스 지음, 김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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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습득하던 새 지식이 대단히 흥미로운 때도 많앗지만,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이렇게 ‘역사 비평적‘으로 해부하는 것이 성서가 내게 가지게 된 개인적 중요성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혹은 과연 화해가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그 시간은 편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 그 시간을 통해 이 같은 힘든 과정을 경험하는 이들을 내가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목적은 그런 이들을 도와 이 과정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6쪽)

성서는 초청이고, 우리가 참여할 여지가 있는, 결말이 열려 있는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성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20쪽)

성서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 우리의 문화, 또 좋든 싫든 우리 각각의 혼을 가르치는 책이다. 성서는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에 박혀 있어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몸속에 지니고 다닌다. 펴보기도 전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펼 때는, 거기서 보게 되는 것과 정말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것이다. (26쪽)

개신교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원죄‘의 근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죄란, 우리 자신-국가로서든 개인으로서든-이 보기에 옳거나 선한 것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옳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다. 독일 신학자 틸리히는 거기에 좀 더 철학적인 의미를 더하여 원죄가 ‘소외‘의 뜻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소외란 우리가 우리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유한한 존재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51쪽)

그 시대가 ‘기적의 시대‘는 아니었겠으나, 그 시대 사람들이 기적을 믿었다는 것, 또 세상을 우리의 렌즈가 아닌 그들 나름의 렌즈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출애굽기의 ‘기적들‘이 뜻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때문이엇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 나름의 언어로 말했다. 성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성서학도는 그 세계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이 세계관을 미신이라고 생각해서 거부해버리지도 않고-종종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현대 과학으로 합리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76쪽)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 흠 있는 역사책이 아니라 어쩌면 훨씬 더 의미 있는 다른 무언가로 읽을 수 있을까? 여행자 중 한 사람이 멋진 답을 내놓았다. 그는 이제 우리가 출애굽기를 두어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기원전 13세기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실제 민족이 실제 상황(7세기) 속에서 먼 과거의 실과 천 조각 들을 모아 자신들을 위한-그리고 온 역사를 위한-인간 해방의 증언으로 짜낸 과정을 또한 말해준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이 과정에 대한 감동적인 증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책이 수많은 세대들에 끼친 위대한 영향에 관해서도 계속 생각해볼 수 있다. (102쪽)

출애굽기를 읽고 지금 또 여호수아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거에서 모아들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되찾아져서 오늘의 문제를 위해 사용되는지 그 과정을 발견하게된다. 실제로 이것은 수많은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이다. (110쪽)

욥기를 주의 깊게 읽고 생각한 후에도, 또 그 모든 신랄한 시와 대담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님은 욥의 구도적인 질문들에 답하지 않으신다. 욥의 위로자들도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것이 답일지 모른다. 무고한 자의 고통에서 어떤 만족스러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궁극적으로는, 아마 헛수고일 것이다. (144쪽)

미첼은 말하길,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욥의 비굴한 굴복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이다. ‘티끌‘을 언급한 것도 자기 비하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비난과 상관없다. 그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욥이 후회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침묵이 더 적절한 응답이었어야 할 상황에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한 존재에 관해서 말하려 한 것이다. (155쪽)

예언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잊혀진 이들과 목소리 잃은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중에게 상기시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8쪽)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언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참으로, 우리는 예언자들을 왜 읽어야 할까? 우리가 예언자들을 읽는 이유는 이렇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등장했더라도 그들의 말이 그들의 시대에만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우리 세계를 왜곡하는 거대한 불평등과 불필요한 고통이라는 역겨운 불의를 고스란히 맞닥뜨리게끔 한다. 먼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말하지만, 그들의 말은 오늘 아침 신문 머리기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다. (186쪽)

우리처럼 그들(복음서 저자들)도 예수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앗다. 그들은 예수를 알던 사람들이나 예수에 관해 들은 사람들에게서 예수에 대해 배워서 예수가 말한 이야기들과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한 것이다. (197쪽)

각 복음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특정 청중을 염두에 두고 썼는데, 이 독자층은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과 종교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중심이 예수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지만, 예수의 의의에 대해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지녔다. 또한, 그들 모두는 다양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한 서로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질적인 그룹들에게 말하려고 자신들의 복음서를 빚을 때, 예수의 의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전달하고 각 그룹의 사고방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해 고민했다. (230-231쪽)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서를 읽을 때 기억하면 좋은 것이 있다. 바울이 그것들을 쓸 때(기원후 53-62년) 복음서들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바울의 편지들을 읽을 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이 잇다. 이 편지들의 모든 수신자들은 예외 없이 로마 통치하에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이 정력적으로 반포한-그리고 필요한 경우 강제력을 동원하여 부과한-정치. 종교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편지 수신자들 양쪽 모두 이 상황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제국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로마는 단지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의 장이었다. 또한 사울은 유대인이었다. (248쪽)

바울의 편지들을 읽을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바울이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의 관습과 윤리를 많이 공유했고 어쩌면 당시의 편견 중 일부도 공유했다. (261쪽)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 들어 있는 바울 자신이 한 말과 누가의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에 관한 이야기 모두를 2000년이 지난 오늘 읽을 때에, 바울과 누가가 모두 상상하지 못한 어떤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두 사람 다 쓴 적이 없는 말이다)는 유대교(이 말도 당시에 쓰이지 않았다)내의 개혁적 분파로서 영아기 단계에서 그다음의 지극히 중요한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 혼자 그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한 유대인 바울은 그 이후 서양 역사 2000년-이 기간 동안 그가 가르친 신앙은 지구를 빙 돌았다-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로마 세계에다 예수의 메시지와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해석해주는 위험한 일을 맡아 한 것이다......그의 과업-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이방) 민족들을 어떻게 아우를 것인가-을 염두에 둘 뿐 아니라 바울의 세계로부터 광대하게 팽창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맞게 되는 도전을 또한 기억하면서 그를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아테네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았다. 그것은 위험과 함정이 가득한 임무였다. (272-273쪽)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칼은 요한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요한은 그 관점을 지닌 채 계시록을 쓰고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런 상황과 상관없지만, 지구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계시록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에 관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다. (313쪽)

즉,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뚯하는지를 파악하려면, 이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동일한 드라마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내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가?......오늘날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에 성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삶의 상황이 우리와 다른 이들, 우리가 ‘다른 이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시각과 견줘 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322쪽)

무엇보다도 성서는 우리가 인류라는 종으로서 저질러온 끔찍한 폭력에 대한 가감 없는 증언이다. 동시에 성서는, 우리를 둘러싼, 그리고 불러 낸 적 없는데도 우리 속에서부터 분출해 나오는, 신비를 직면하려는 인류의 시도들을 기록해놓은 문서이기도 하다......성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유가 또 있다. 성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라고 권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돕도, 모든 종교 전통의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나뉠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쳐준다.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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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밤을 새워 읽은 그들의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알아야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당연 김태연이 써야지만 알 수 있는 기형도 이야기이다. 기형도와는 거리가 먼 온갖 장소에서 떠돌아 다니던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잠재웠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이가 내게는 있는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는, ~~카더라가 아닌 진짜 내 모습을 알고 있는 이가 있는 지도 곰곰히 되집어 본다. 뭔가를, 누군가를 안다는 건 시간을 들여 공들여 함께한 내밀한 노력들이 곰삭아서 충분히 발효를 한 이후에야 말 할 수 있으리라. 오랜 시간 후에 드러난 그들의 이야기, 그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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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김태연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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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꼼꼼한 성격이 책장 전체에 그대로 묻어났다. 책 한 권 한 권마다 메시지 무게까지 일일이 담고 재배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책 한 권을 이렇게 대할진대 사람은 오죽할까. 기형도의 배려심음 유별난 데가 있었다. 누가 외로워하거나 소외되어 있는 꼴을 못 보았다. 어떤 모임에서나 술자리에서 누가 약간만 외톨이로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옆으로 가 챙기는 스타일이니까. (146쪽)

이 세상에 정해진 건 없어. 단지 정해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문제는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이란 허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혹한다는 거야. 숙명이니 뭐니 이름을 붙이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그 증거일세.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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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도시를 잘 알면 된다지만, 이웃조차 알 수가 없다. 서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 거 같다. 서울의 운명이 설마 나의 운명일까는 저만치 있고, 정치하는 이들의 손에 오가고 있다. 조금씩 쓸려가고 있는데 도무지 알 수 없다. 누군가는 하고 있겠지... 요즘 많이 힘든다. 너무나 주체적이고 매우 많이 알고 있는 나는 행복하지 않다. 무식한 상사를 만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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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발견 - 행복한 삶을 위한 도시인문학
정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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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행복한 시민으로 살고 싶다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4쪽)

타고난 아름다움을 깨뜨리지 않고 잘 지키는 것, 그대로 두는 것Let it be, 이 또한 매우 훌륭한 도시설계다. (91쪽)

오래된 건물과 장소를 없애고 새로 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진짜 어려운 일은 오래된 것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건축이고 참한 도시설계다. (102쪽)

재개발의 또 다른 문제점은 건물주나 토지주 또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106쪽)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재개발을 할지 말지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의사결정은 대부분 돈과 힘을 가진 강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111쪽)

좋은 도시를 원한다면 그만큼 시민도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119쪽)

도시가 정치라면 시민들도 정치적이어야 한다. 강력한 권력과 엄청난 자본의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시민의 단합된 힘뿐이다. (142쪽)

"진보적 도시란 가난한 사람들까지 자가용을 타는 곳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곳이다." (153쪽)

마을의 재생이든 도시의 재생이든 결국은 건물이나 도로 같은 하드웨어보다 ‘사람‘에 달려 있고 ‘순환체계‘가 중요하다. (181쪽)

익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마을‘은 매우 중요한 의제다. 마을은 나에게 무엇인지, 마을공동체는 과거의 추억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에게 마을과 마을공동체는 중요하다. (216쪽)

누군가가 만들어준 공간은 그저 비어 있는 ‘터‘일 뿐이다. 거기에 내가 들어가 살 때 빈터는 비로소 ‘삶터‘로 바뀐다. 내 삶이 담기기 전의 터가 ‘공간space‘이라면, 내 삶이 배어 있는 삶터가 바로 ‘장소place‘다. 스페이스와 플레이스는 전혀 다른 것이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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