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서리에서만, 소수자에게만, 힘없는 자에게만, 을에게만 보이는가. 징병제. 도덕. 안보. 문화. 섹슈얼리티. 노동. 삼성. 알바. 민주화 등... 단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내려져야 하고, 여기서 정의는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또는 의미라는 거다. 정의에 따라 해야 할 일의 범위와 대상과 기간이 정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누구의 손에 들어 가는가에 따라 오용, 남용, 왜곡으로 변질된다. 이게 정확하다고 할 때도 누구의 주장인가도 관건이다. 우리 모두가 수긍하여 도출된 사전적인 정의만으로는 지금 여기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죽은 언어로 될 가능성이 높다.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부유한 의미로 애매모호하게 덧 입혀져, 또 다른 권력의 행태로 나타나고, 정작 원래의 정의와 정의는 사라지고, 의미보다는 형태와 모양을 갑론을박하는, 그 소리조차 개개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정도로... 나에게 힘이 있다면, 내가 갑이라면 그때에 없었을 때의 순간을 잊지 않는 것. 그런데 언제 힘이 생기려나, 지금 이조차 유지하는 게 힘드는데. "그저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이 우리 시대에는 이토록 어려운 과업이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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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에서의 사유 -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
최태섭 지음 / 알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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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의 경험이 한국 남성들에게 주는 상처는 단지 누가 그것을 빠져나가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실행되고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으면 결코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지난 세기의 군비 경쟁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만큼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군대다. (29쪽)

도덕적인 비판은 사실 정밀한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집권자들의 흠을 잡아내는 데 정밀한 사고씩이나 필요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요 공직자들이 모두 군미필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복무가 공직자의 자길과 자격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될 수는 없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이지, 도덕으로 통치하는 사회가 아니다. (35쪽)

그런데 오는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 오랜 시간 고민을 해야 했다. 그것도 글의 주제 때문에 말이다. 지난 한 달간 그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벌어졌는데 대체 왜 고민을 하느냐고?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것들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이 맞느냐는 거다. (66쪽)

물론 먹고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아마존을 불태우고, 생물들을 멸종시키고, 4대강을 파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착하게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세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범죄가 단순히 악한 개개인들의 책임만은 아닌 것처럼,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역시 그들이 못나거나 모자라서만은 아닌 것이다. 나아가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리를 너무 `안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선의는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착하게 사는 게 어려운 것은 그 결과를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78쪽)

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 우리를 강타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사는 것을 다시금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종의 기계적인 반응들을 토앻서 버텨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거대한 막연함 속으로 던져놓는다. 삶의 기준은 너무 많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대부분이 뿌리 없이 부유하는 것일 때름이라는 사실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이제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들을 견뎌내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어쩌면 이 우문들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불쾌감은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들을 다시금 수면으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7쪽)

180센티미터가 그토록 경악스러운 것은 그돌안 `보는 자`로만 일관했던 남자들의 뒤통수에 그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빛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이상 스스로 세운 기준들, 요컨대 `내면의 건실함`이나 `외모로 드러나지 않는 비범함` 같은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남자를 품평하는 기준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고 있다는 것은 21세기 이후 남자들에게 주어진 크나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생겨나는 기준들을 `된장녀`에 업데이트 시키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거부하겠다고 성질을 부리는 것은 사실상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쾌락의 문제에 유일한 도덕률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쾌락을 위해 누군가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터다. 그리고여자들에게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기준들은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만날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차원의 문제다. (137-138쪽)

"대한민국에서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양성평등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진보적 가치보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라는 정봉주 전 의원의 고백은 정확하다......도덕으로 인식될 만큼 지루한 당위들이 아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것이, 그래서 내 욕망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얼마드닞 자유롭게 내뻗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자유로운 욕망들의 세상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149쪽)

어떻게 하면 알바를 착취하는 데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권리를 찾는 고객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빌린 벤츠를 몰고 돌진하지 않으면서도 성의 깊은 곳에 있는 결정권자들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체계가 만들어내고 있는 과잉에 취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따른 착취들을 문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권리 찾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비자투쟁을 벗어날 수 없다. (197쪽)

과거 이 중산층은 사회통합을 위해,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대중의 형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논리는 이러한 중산층의 유지비용을 더이상 지불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이 기거하고 있는 도시의 비효율적 공간들을 `디자인 서울`이나 `재개발`같은 것을 통해 더욱 많은 효용을 창출할 수 있는 곳으로 바꾸고자 하며, 또 공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아파트에 살면서 자가용을 모는 정규직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즉 자본과 국가가 이전에는 애매모호한 중산층과 결탁해 하층계급을 추방하고 좇아냈다면, 이제는 진정한 중산층과 결탁해 가짜 중산층을 몰아내고 그곳에 `양극화`를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200쪽)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화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민주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명쵀하기 정리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과거에 벌어진 일이고, 그것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조차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세력의 일부에 의해서 성급히 공식화되고 국가화됨으로 인해,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과 뻗어나가야 할 이야기들이 모두 화석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화 유공자와 보상이라는 이른 논공행상과 이를 둘러싼 잡음들은 이 화석화에 무게를 더하는 동시에 모조으이 `공수 전환`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민주화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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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워 읽은 글이 무겁기만 하다. 편리와 풍요를 쫓으면서 한가지 모양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정상이 아니다. 어떻게 한가지 물음에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는가... 각자의 수많은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서로의 다른 길도 충분히 가능하고, 그 누구에게도, 자연도 우주도 영적으로 몸과 마음까지, 피해를 주지 않고 공생가능한, 몇세대의 영원과 지금 현세의 살아있는 모든 것과 연결되고 하나가 된 토착민들의 삶이 경이롭다... 그러나 우리의 불편을 편함으로 바꾸기 위하여, 우리 눈이 수용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우리가 적응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강제와 힘으로 밀어부쳐 파괴하고 없애버린 원주민들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단일화되고 표피적인 지금 우리의 삶은 '극단적'이다 못해 벼랑끝에 서 있다.  그들의 기반을 허물지 않고 포용했더라면 지금 우리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단초가 되고 대안이 될 수 있고 지구를 구해 줄 수도 있는데...

"우수함의 기준이 바뀌어서 참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번영할 수 있는 능력, 진심으로 대지를 경외하고 감사해하는 마음 자세 같은 것이 최우선으로 꼽는다고 한다면 서구의 패러다임은 낙제점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종의 가장 고귀한 열망을 담아내주는 절대적인 명제로 신앙의 힘, 영적인 직관력, 종교적인 갈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너그러운 마음씨 등을 꼽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독단론은 또다시 그 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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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천 개의 얼굴 - 아마존에서 티베트까지, 인류 지혜의 원형을 찾아 떠나는 40년의 여행
웨이드 데이비스 글.사진, 김훈 옮김 / 다빈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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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이슈는 오늘날 이 세계의 수많은 문화가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모든 사상과 신화와 통찰의 총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인 인종권ethnosphere의 경이로운 다양성과 특징이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사진들과 이야기들이 그런 이슈를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인종권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그것은 우리 꿈의 소산이요, 우리 소망의 구현이요, 우리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의 상징이요, 대단히 탐구적이고 놀라우리만치 적응력이 강한 종인 우리가 창조해낸 모든 것이다. (7쪽)

많은 낱말과 문법으로 이루어진 언어는 인간 정신의 정수요, 각 문화의 혼이 물질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만큼이나 성스럽고 신비롭기 때문에 언어를 생물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생물종들이 적당한 정도로 탄생할 경우 멸종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인류의 활동에 따라서 많은 생물종이 사라지는 현재의 흐름은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격하다. 언어도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항상 진화해왔다. 과거에 라틴어는 실생활의 현장에서 퇴조하기 전에 다양한, 그러나 서로 연관된 20여 개의 언어를 낳았다. 그런 반면, 오늘날에는 한두 세대 안에 많은 언어가 그 후예들을 낳을 겨를도 없이 생물종만큼이나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다. (16쪽)

노상 침묵에 휩싸여 지내야 하고, 우리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노인들의 말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지혜와 지식과 내가 알고 있는 온갖 경이의 세계를 말할 기회조차 없는 것보다 더 고독하고 쓸쓸한 경우가 또 있을까? (17쪽)

우리는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것들과 덜 기여하는 것들을 어떻게 가를 수 있을까? 가난을 덜어주고 사람들을 외로움으로부터 구해내주는 종족의 결속력이나 유대감은 얼마마한 가치를 지닌 것일까? 우주, 영적인 영역, 신앙의 의미와 실천에 관한 다양한 직관적 통찰들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강과 숲을 보호해주는 결과를 낳는 제례 의식들은 경제적으로 얼마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으며, 양으로 환산해서 계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결과, 사라지고 있는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24-25쪽)

알렉스가 이야기를 할 때면 듣는 이가 그 이야기의 정수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했다. 듣는 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의 모든 음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재현의 순간이요. 우주의 원무 속에 끼어들어가 거듭해서 돌 수 있는 기회였다. (52쪽)

모든 문화는 하나같이 기본적인 도전 과제들을 안고 있다. 남녀가 만나고,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는 그 아이들을 양육하고 보호해준다. 노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태연자약한 태도로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인간이 된려면 밤하늘, 엄청난 폭풍우, 새벽 공기를 찢고 터져 나오는 적들의 섬뜩한 함성 같은 것들이 안겨주는 공포와 장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체험을 갖고 있다. (98쪽)

산이 수호신의 거주처라는 믿음을 갖도록 교육받은 아이는 산이 자기네가 마음먹기만 하면 언제든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생명 없는 거대한 바윗덩어리라 여기게끔 교육받은 아이와는 아주 다를 것이다. (100쪽)

데니스는 말했다. "이제 당신한테 물어볼게요. 그 샤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비밀을 알아냈을까요? 5만 종이 넘는 식물이 우거진 숲 속에서 하나는 덩굴이고 하나는 관목이라 서로 아주 다른 두 식물을 찾아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봐요? 그리고 그들을 대번에 별세계로 보내주는 이런 놀라운 즙액을 만들기 위해 제각기 아주 유별나고 독특한 화학적 성질을 지닌 두 식물이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주게끔 아주 정교하게 결합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은 또 얼나마 된다고 보나요? 말해봐요." (136쪽)

식물학자들에게 그 모든 식물은 그저 바니스테리오프시스 카피라고 하는 한 가지 종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한 눈에 척 보고도 그 종들을 쉽게 식별해낼 수 있으며, 각기 다른 종족 출신의 인디언들도 거의 일관되게 그 하나하나의 종을 식별해낼 수 있다. 테렌스는 말했다. "그 식물들이 서로 다른 음조로 당신에게 노래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그리고 그 식물들과 나눈 진짜 대화를 근거로 하고 있는, 일관되고 진실한 분류학적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 한번 생각해봐요." (138쪽)

사실, 보둔은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아우르는 자비로운 신앙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은 참으로 민주적인 종교다. 왜냐하면 그 신자들은 영적인 직접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신들을 제 몸 안에 받아들여 변형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보둔교는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승 사람들은 신들을 탄생시킨 조상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승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제대로 섬기면 죽은 이들이 산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 신자들은 죽음이 삶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든다. 그들은 그저 죽음을 인간의 영적 요소와 육체적 요소가 분리되는, 더없이 중요한 순간이자 취약한 순간으로 여길 뿐이다. (153쪽)

아이티는 문화적 믿음이야말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전혀 다른 현실을 낳는다는 확신을 내게 안겨줬다. 뒤이은 여러 해 동안 나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 곧 보르네오의 삼림과 티베트 고원, 동아프리카의 사막, 북극의 빙원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아이티에서의 기억은 줄곧 그런 지역들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렌즈 역할을 했다. 그 기억 덕에 나는 각각의 문화는 당연히 해당 지역 사람들의 전통 유산과 소망의 유일무이한 측면을 대변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더 깊이 끌어안으면 안을수록 온 세계를 휩쓰는 현대적인 온갖 것이 곧 닥쳐올 파국을 뜻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더욱더 짙어졌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다양성에서 더욱더 멀어져가고, 언어들은 자꾸 사라져가고,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민족들은 폭력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177족)

문화적 생존은 문화적 보존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모든 사회는 끊임없이 진화하므로 변화 그 자체가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메이버리 루이스가 말한 바와 같이, 문화는 그에 속한 이들이 자기네 과거에 충분한 신뢰감을 갖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문화가 앞으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온갖 변화 속에서도 그 정신과 진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을 갖고 있을 때 생존한다. (188쪽)

그들의 언어는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이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복잡한 사회 친화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유목민인 프난 사람들은 시간 개념이라는 걸 갖고 있지 않으며, 임금노동이나 가난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놀이로서의 여가와는 상반되는, 힘겨운 부담으로서의 노동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저 매일의 연속을 뜻하는 삶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학업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배우며, 그것도 흔히 부모 곁에서 배운다. 가족들이나 개인들이 숲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자족하고 자립할 수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는 전문가가 따로 없고, 위계도 거의 없다......프난 족이 우리와 가장 크게 대비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에 부여하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을 축적해야 할 동기나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 사회에서 부의 측정 기준이 되는 것은 소유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관계의 힘이다. (209-210쪽)

변혁과 지배라는 마오의 계산법 속에는 종교 및 정신과 관련된 모든 개념, 문화와 가족의 시학, 남자와 여자와 자연의 관계에 관한 직관적 통찰, 흙의 향내, 돌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의미 같은 것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민족성이란 그저 경제적 불평등의 소산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물질적 불평등이 해소되고 나면 민족 간의 구분법은 저절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물론 티베트는 낡은 것의 전형이었다. 중국은 새로운 것의 전형이었고, 따라서 문화대혁명은 티베트 옛 문화의 모든 면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뜻했고, 또 실제로 그런 공격을 하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258쪽)

대지에 있는 모든 지형지물은 원형의 것들에 대한 기억과 융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늘 새로 태어나고 있다. 모든 동물과 사물은 옛 사건들의 맥박과 더불어 울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꿈구는 일을 통해서 새롭게 탄생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 땅에는 리얼리티의 모든 차원에서 존재해왔던 모든 것,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인코딩되어 있다. 그 땅을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확인 행위, 무한한 창조의 춤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 첫발을 내디딘 유럽인들은 그곳 원주민들의 심오한 지적, 정신적 성취에 대한 이해의 단초가 되어줄 만한 언어도 상상력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유럽인들이 만난 사람들은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기술적인 성취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괴이해 보였고, 그들의 습관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277-278쪽)

영국인들은 개들을 이용하는 것을 경멸했기에 무거운 짐을 실은 썰매를 자기네가 직접 끌고 육로로 해서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캐나다의 광대한 한대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교역소까지 가기로 했다. 어느 탐험가가 지적한대로 그들은 그들과 비슷한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 하지 않고 자기네 환경을 거기가지 짊어지고 간 탓으로 죽었다. (289쪽)

세계 전역의 토착 민족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약속에 홀려서 많은 경우 기꺼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옛 것에 등을 돌려왔다. 그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자기네 전통과 단절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서구 세계의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비참한 덫에 걸린 채 화폐경제의 변방에 거주하는 도시 빈민 군단에 속하는 운명에 처할 것이다. 문화는 사라져도 흔히 옛 자아의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된 개인들은 시간의 덫에 걸긴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배우려고 열심히 애써온 가치들과 간절히 얻고 싶어 한 부를 지닌 세계에서 자기네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도 닫혀 있다. 모더니티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세속적인 물질주의의 승리다. 하지만 이런 삶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297쪽)

그런 삶과 타협하려는 우리의 성향 가운데서 과연 이 행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온갖 쓰레기로 공기와 물과 흙을 오염시키고, 많은 식물과 동물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강을 댐으로 막아버리고, 해묵은 숲을 벗겨내 버리고, 인간을 보호해주는 하늘의 층들에 구멍을 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환경의 생화학적 질서를 뒤바꿔놓으려 위협하는 산업화 과정을 저지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문명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말은 바로 `극단적extreme`이라는 말이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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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본 확실하고 분명한 실체, 아주 가까이서 그렇게 보지 않고서야 이 책에서 마주하는 곳곳의 상황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범위와 깊이를 넘어 설 수 없다. 글을 읽다 보니 이게 아니었네. 그럼 이거? 그것도 아니네. 오해와 편견이 넘쳐난다. -광부들. 무슬림. 난민. 죽음을 앞둔 사람들. 달동네.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시골분교. 철거민. 떠돌이 영화감독. 장애인. 독거노인. 단원고. 야학. 신가족 그룹홈. 연평도민.- 과연 이들을 만났을 때 내 생각의 꼭지들은 어떨까를, 멈출수 밖에 없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 무지였다는 거.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게 악이라는 시선으로. 제대로 본다는 거. 보려고 얼굴을 돌리는 거조차 외면했다는 거. 나와 무관한 일로 치부했다는 거. 그러니 제대로 생각이나 했겠냐구. "OO은 ***하다."라는 일반적인 오류로 한꺼번에 정의내린 문장으로 그들을 바라본 거다. all or nothing/ 선악/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높고낮다/ 많다적다/ 나와 너의 양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고정되고 굳어져 가고 있는 나의 생각과 몸을 잠시 멈추게 한 글이다. 소싯적에 재활원에서의 몇시간 봉사와 맹인선생님과의 대학원공부 등이 기억난다. 그냥 가만히 조심만 했던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조심이 편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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