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의 경험이 한국 남성들에게 주는 상처는 단지 누가 그것을 빠져나가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실행되고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으면 결코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지난 세기의 군비 경쟁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만큼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군대다. (29쪽)
도덕적인 비판은 사실 정밀한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집권자들의 흠을 잡아내는 데 정밀한 사고씩이나 필요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요 공직자들이 모두 군미필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복무가 공직자의 자길과 자격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될 수는 없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이지, 도덕으로 통치하는 사회가 아니다. (35쪽)
그런데 오는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 오랜 시간 고민을 해야 했다. 그것도 글의 주제 때문에 말이다. 지난 한 달간 그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벌어졌는데 대체 왜 고민을 하느냐고?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것들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이 맞느냐는 거다. (66쪽)
물론 먹고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아마존을 불태우고, 생물들을 멸종시키고, 4대강을 파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착하게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세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범죄가 단순히 악한 개개인들의 책임만은 아닌 것처럼,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역시 그들이 못나거나 모자라서만은 아닌 것이다. 나아가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리를 너무 `안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선의는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착하게 사는 게 어려운 것은 그 결과를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78쪽)
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 우리를 강타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사는 것을 다시금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종의 기계적인 반응들을 토앻서 버텨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거대한 막연함 속으로 던져놓는다. 삶의 기준은 너무 많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대부분이 뿌리 없이 부유하는 것일 때름이라는 사실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이제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들을 견뎌내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어쩌면 이 우문들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불쾌감은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들을 다시금 수면으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7쪽)
180센티미터가 그토록 경악스러운 것은 그돌안 `보는 자`로만 일관했던 남자들의 뒤통수에 그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빛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이상 스스로 세운 기준들, 요컨대 `내면의 건실함`이나 `외모로 드러나지 않는 비범함` 같은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남자를 품평하는 기준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고 있다는 것은 21세기 이후 남자들에게 주어진 크나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생겨나는 기준들을 `된장녀`에 업데이트 시키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거부하겠다고 성질을 부리는 것은 사실상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쾌락의 문제에 유일한 도덕률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쾌락을 위해 누군가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터다. 그리고여자들에게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기준들은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만날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차원의 문제다. (137-138쪽)
"대한민국에서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양성평등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진보적 가치보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라는 정봉주 전 의원의 고백은 정확하다......도덕으로 인식될 만큼 지루한 당위들이 아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것이, 그래서 내 욕망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얼마드닞 자유롭게 내뻗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자유로운 욕망들의 세상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149쪽)
어떻게 하면 알바를 착취하는 데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권리를 찾는 고객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빌린 벤츠를 몰고 돌진하지 않으면서도 성의 깊은 곳에 있는 결정권자들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체계가 만들어내고 있는 과잉에 취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따른 착취들을 문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권리 찾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비자투쟁을 벗어날 수 없다. (197쪽)
과거 이 중산층은 사회통합을 위해,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대중의 형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논리는 이러한 중산층의 유지비용을 더이상 지불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이 기거하고 있는 도시의 비효율적 공간들을 `디자인 서울`이나 `재개발`같은 것을 통해 더욱 많은 효용을 창출할 수 있는 곳으로 바꾸고자 하며, 또 공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아파트에 살면서 자가용을 모는 정규직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즉 자본과 국가가 이전에는 애매모호한 중산층과 결탁해 하층계급을 추방하고 좇아냈다면, 이제는 진정한 중산층과 결탁해 가짜 중산층을 몰아내고 그곳에 `양극화`를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200쪽)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화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민주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명쵀하기 정리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과거에 벌어진 일이고, 그것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조차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세력의 일부에 의해서 성급히 공식화되고 국가화됨으로 인해,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과 뻗어나가야 할 이야기들이 모두 화석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화 유공자와 보상이라는 이른 논공행상과 이를 둘러싼 잡음들은 이 화석화에 무게를 더하는 동시에 모조으이 `공수 전환`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민주화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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