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미술관 - 기억이 머무는 열두 개의 집
박현정 지음 / 한권의책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유행가만큼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도 없다." -배영환 (33쪽)

"우리가 역사와 신화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데 비극이 있다. 망각은 인간에게 치유와 동시에 불행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서용선 (90쪽)

"나는 정말이지 어깨동무하는 것처럼 신체가 길게 늘어나서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 그러나 삶 속에선 같은 여성들끼리도 잘 닿아지지 않는다." -윤석남 (104쪽)

"우정이란 두 사람이 서로를 괴롭혀서 서로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 -프란시스 베이컨 (166쪽)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 - 한병철 (1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장과 단어를 마주할 때, 세상을 향하여 나 자신을 향해 연결지어서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관찰하기'가 떠올랐다. 상상의 날개로 나에게 '접목'시켜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과 현실의 틈새로 '스며드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혹당하는 게 우선이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매혹당해야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간의 많은 읽기가 그 자리에 머물러 고개만 끄덕이며 그렇구나만 반복했다는 반성도 뒤따른다. 나는 왜와 연결하여 가장 작은 단위의 질문까지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혼자가 되어 있을 거다. 그러면 지금의 상황과 연결된 대상의 본질('언제든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사물 혹은 두 대상 사이의 경험적 차이는 아니다. 본질이란 주체의 중심에 있는 어떤 최종적인 성질의 현존으로서, 주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309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본질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또 다른 생각과 사건이 된다. 책을 덮는 순간 고통을 덮으려는 시도나 너와 나의 일로 이분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게 하는 소비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세히 바라보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태도, 지속적으로 작금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괴로워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월은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를 보면서 시작했다. 알랭드보통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가 겹쳤다.  순전히 제목 때문이지만, 원제는 'take this waltz', 'the romantic movement'.

설레임이 익숙함으로 새것이 오래된 것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과 어디까지가 사랑일까라고 묻고 있는... old 한 것은 이전에 new 였음을 기억한다면, 사랑일까라는 질문은 우문에 불과하다. 떨림만 사랑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혼자가 되는 책들
최원호 지음 / 북노마드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품을 이해하고 분류하려는 두뇌의 오랜 욕망에 앞서 몸과 마음이 먼저 작품과 연결되는 순간은 각별한 데가 있다. 전시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인 `나`의 일부와 작가의 일부가 만나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감상을 이끈다. 일조으이 공명현상이다. 누군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작품은, 그 떼어진 삶이 가지고 있던 인식 및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이 파장은 감상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44-45쪽)

그러나 대개는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어지고 이해하고 싶어진다. 사랑은 자신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던 객체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포섭하려는 욕망과 그에 따른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을 향해 던져지는 질문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나는 그를 내 안으로 초대하고 있다)이며, 그 결과로 떠오르는 감상이란 자시닝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해 성의껏 구한 답으로서 도출되는 것이다. (57쪽)

에세이란 궁극적으로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고, 매혹은 사랑의 시발점이며, 사랑은 그 성패가 아니라 사랑을 품에 안고 있엇던 동안의 삶으로서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105쪽)

윌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관객의 내면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즉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130쪽)

사진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 그러하듯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신비를 소유함으로써 나에게서 존중받는 타자-다르지만 동등한 존재-가 된다. 감상자는 사진을 먹어치울 수 없고 사진과 대화해야 한다. (138쪽)

행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텍스트는 스펙터클의 형태로 소비되며, 그 과정은 `하나의 대중적인 취미활동, 분리된 영역에 대한 분리된 비판의 확대된 장`의 형성에 그친다. 종교가 아편과 같은 것이라면 독서로 종료되는 혁명은 알코올이다. 여기에 취할수록 육신의 힘은 풀리고 암울한 현실을 마주할 엄두를 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직 감탄하기 위해 좀더 세련되고 강렬한 텍스트-이론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보다 완벽한 꿈을 꾸기 위해 보다 많은 생을 잠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151쪽)

파크 픽션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언젠가 소망들이 집을 떠나 거리로 나갈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에 대해 사고한 텍스트들이 책으로부터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말로 사람들 곁에 실재하는 벗의 형태로 서려는 광경이다. 어떤 텍스트가 그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지적 계급을 방어하는 장벽으로 작용하는 대신에 실재하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려는 도구가 되어 길 위로 나서려는 시도다. 이 시도는 언제쯤 몇몇의 성공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패턴으로,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으로 정착할 수 있을까? (158쪽)

곱게 손질한 슬픔은 당의정처럼 고통의 겉에 더씌어져 그 고통을 독자들이 삼키기 쉽게 해준다. 고통은 감상을 통해 변된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감동시키는 글은 고통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하는 대신에 고통을 수단으로 삼은 다른 무엇을 바라보게(소비하게)한다. 그러면 질문은 거기서 끝나고 고통은 책을 덮는 순간 함께 덮이고 만다. (183쪽)

자기 아닌 존재에 대한 경외를, 또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마음이 채워지는 경험 없이 어른이 된 인간들로 가득한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곳이다. 인간은, 타인은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타인은 수단이고 사물이며 장애물이 된다. 이런저런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그 지경에 다다랐다면 이미 인간 외의 `것`들은 치욕스러운 꼴을 당한 지 오래일 것이다. (226쪽)

그가(미야자키 하야오)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이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아이일때만 체득할 수 있는 `나다움`이야말로 요동치는 세계를 헤쳐 나갈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다움을 간직한 채 성장한 아이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다가와도 쉽게 비틀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235쪽)

그런데 모른다는 게 답이다. 드레즈너는 모름을 인정하기야말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임을 은영중에 설파한다. (255쪽)

[일본 섹스 시네마]는 핑크 영화들끼리 또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 장르와의 연결점 역시 다양하게 제공한다. 연결점의 개수는 독자 자신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 링크들이 당장 무슨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장르내에서 `차이와 반복`을 발견하는 건 늘 재미있는 일이며, 그렇게 열린 시야는 다른 무언가를 볼 때에도 더 넒은 시각을 제공하게 마련이다. (264쪽)

삶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체계를 증거하고 그 체계는 또다시 다른 생각과 사건들을 꽃처럼 피워낸다. (285쪽)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도 막연한 애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대를, 세계를 내 안에서 전유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그러려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존재론이나 문학론의 여부를 떠나서 삶의 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02쪽)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죽음이 앗아간 것들에 대해 말할 때뿐이다. 소중한 추억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랑을 받아드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시간들, 어째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고통이 신앙에 있어 필요한 시련인가라는 물음("내게(...)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슬픔의 형태, 그렇게 형태가 달라지는 슬픔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아감인지 아니면 후퇴인지를 가늠할 수 없을 때의 혼란......이 종잡을 수 없는 조각들이 [헤아려 본 슬픔]의 전부다. (316-317쪽)

아무도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아무도 우리의 슬픔을 가늠하지 못할 것처럼, 사랑이 오직 하나이므로 죽음 역시 오직 하나일 뿐이다. (320쪽)

가장 짧은 시간과 영원한 시간 사이의 틈에는 모든 존재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정확히 지금 이 우주만큼 광활하지만 어떤 각본이나 기대나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또는 버려진) 빛들로 이루어진 `틈의 우주`다. 빛과 소리의 떨림이(또는 은총의 전달 체계가) 언어를 대체했으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의미로부터 벗어나 홀로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곳. 필립 퍼키슨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두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것들 사이로 가기. 틈의 일부가 되기.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공간, 울림, 빛, 공기, 움직임, 살모가 죽음에 조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밖으로 나가서 내`자신`을 찾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3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렵다. 읽기가 불편하다. 역자후기를 먼저 읽었다. 읽다가 발견한 두장의 단풍잎이 반가웠다. 언제 누가 넣었을까. 기억나지 않아 아쉽지만.  

시간은 저 혼자 흐르고 보는 순간이 실재가 될 수 없음을 그림을 예시로 제시하고, 시간을 통하여 지금 내가 있는 좌표를 확인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밖에-마음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만. 지금 거주하는 공간은 나의 삶이 들어 있지만 현대의 단절된 관계는 임시공간에 불과하다는 거. 시공간에서 소외된 우리의 회복은 사랑과 언어이다. 저자에게 온 당신이 보낸 엽서에서, 지금 여기에 없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므로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실재를 알 수 있다. 결국에는 사랑만이 분리된 시간과 공간을 온전한 나의 것으로 가져다 줄까... 함께 있어도 시간의 속도가 다르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으니...  

 

다음은 표지 뒤의 글이다.

"존 버거는 이 책에서 근대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에 의해 인간이 '시간'과 분리되었고, 문명과 도시화에 의해 인간의 근원적 '공간'으로서의 집이 와해되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낭만적인 사랑'과 '시 또는 언어'로 다시 세워진 집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버림받고 상처받은 현대의 인간이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렌즈를 통해 보듯 우리의 덧없는 삶의 경험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현대인들을 인간의 근원적인 시간과 공간 속으로 안내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분리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과도 같은 이별을, 언어에 기댐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또한 반 고흐, 카라바조 같은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 실재를 획득하기 위해 고투했던 과정을 보여주면서, 삶의 근원에 다가서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제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시간 사이에 있다. 육체의 시간과 의식의 시간이 그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권에서는 육체와 정신사이의 구별이 존재한다. 정신이 우선시되며, 무엇보다도 정신은 육체의 시간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17쪽)

그러나 모든 죽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그 유대에 속하긴 한다. 그들은 더-이상-삶이-없는-모든-존재로 거기 있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상상에 의해 존재한다. 죽은 자에게 이 변연은 산 자에게와는 다르게 어떤 경계도 장애도 아니다. (22쪽)

그림들이 보여주는 천재성 때문이 아니다. 그 그림들이 연유된, 그리고 그림들이 표현하고자 한 삶의 경험들-세상의 역사만큼 끈질기게 스스로 드러나는 욕망, 세상의 끝 같은 미묘함, 낯익은 몸에 대한 사랑을 마치 처음처럼 끝없이 재발견해 가는 눈-이 모든 것들은 말 이전에 다가와 말의 영역 너머로 옮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32쪽)

역사적 혹은 개인적 사건들에 의해 이미지의 중요성은 물론 변하지만 그려진 내용은 변함이 없다. 같은 병으로부터 같은 우유를 따르며, 바다의 파도는 변함 없이 같은 모양이고, 얼굴과 미소 역시 변함이 없다. 회화는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사진이 찍히는 순간과는 달리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화가 순간을 담아낸다는 말은 맞지 않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화는 본질상 그 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34-35쪽)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쉽사리 폐기될 수 없다. 시계만을 보면 시간은 느리게 가지도 빨리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에 의해 시간의 흐름이 단일 과정이 아닌 서로 대치되는 두 개의 역동적 과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축적과 낭비가 그것이다.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48쪽)

시각은 눈을 의미한다. 눈은 보이는 것과 보는 존재가 만나, 관계를 이루어내는 곳이다. 하지만 그 보는 존재가 인간일 경우, 시간이나 거리 때문에 눈이 보지 못하거나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잇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과거에 보았던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이른바 부재의 시각적 경험 역시, 시각에 대한 인간의 이런 양면성을 가진 인식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의 사람짐을 마주한다.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그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부인하게 되는 것,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투쟁이 뒤이어 일어난다. 따라서 시각은 비가시적인 것 역시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고, 한번 본 것들이 공간이라는 복병에 의해 부재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영구히 맞서 보전하고 조합하고 정리하는, 내면적 눈을 기를 것을 촉구한다. (64-65쪽)

당신 편지 봉투에 씌여진 글자를 보면서, 당신 목소리를 듣는다. 목소리를 듣는 것과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기억은 회상이다......목소리는 우선 몸에 속하고 다음으로 언어에 속한다. 다른 언어로 말하더라도 목소리는 동일하다. (67쪽)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 강요됨 없이 선택한 이 습관들은 그 자체로는 일시적이지만 반복을 통해서 다른 어떤 숙소보다 더 영속적인 주거처를 제공한다. 집은 더 이상 주거의 장소가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삶의 숨겨진 이야기일 뿐이다. 혹독하게 말한다면, 집은 단지 그 사람의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83쪽)

사랑은 모든 거리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분리와 공간이 아예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받는 사람이든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간과 사랑 사이에는 원초적인 대립이 존재한다. (113쪽)

언어는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 경험의 전체성을 낱말들을 통해 껴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공간도 허락한다. 이런 면에서, 언어야말로 잠재적으로 인간의 유일한 집인 동시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없는 유일한 주거지이다. (12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