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이해하고 분류하려는 두뇌의 오랜 욕망에 앞서 몸과 마음이 먼저 작품과 연결되는 순간은 각별한 데가 있다. 전시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인 `나`의 일부와 작가의 일부가 만나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감상을 이끈다. 일조으이 공명현상이다. 누군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작품은, 그 떼어진 삶이 가지고 있던 인식 및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이 파장은 감상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44-45쪽)
그러나 대개는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어지고 이해하고 싶어진다. 사랑은 자신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던 객체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포섭하려는 욕망과 그에 따른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을 향해 던져지는 질문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나는 그를 내 안으로 초대하고 있다)이며, 그 결과로 떠오르는 감상이란 자시닝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해 성의껏 구한 답으로서 도출되는 것이다. (57쪽)
에세이란 궁극적으로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고, 매혹은 사랑의 시발점이며, 사랑은 그 성패가 아니라 사랑을 품에 안고 있엇던 동안의 삶으로서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105쪽)
윌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관객의 내면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즉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130쪽)
사진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 그러하듯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신비를 소유함으로써 나에게서 존중받는 타자-다르지만 동등한 존재-가 된다. 감상자는 사진을 먹어치울 수 없고 사진과 대화해야 한다. (138쪽)
행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텍스트는 스펙터클의 형태로 소비되며, 그 과정은 `하나의 대중적인 취미활동, 분리된 영역에 대한 분리된 비판의 확대된 장`의 형성에 그친다. 종교가 아편과 같은 것이라면 독서로 종료되는 혁명은 알코올이다. 여기에 취할수록 육신의 힘은 풀리고 암울한 현실을 마주할 엄두를 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직 감탄하기 위해 좀더 세련되고 강렬한 텍스트-이론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보다 완벽한 꿈을 꾸기 위해 보다 많은 생을 잠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151쪽)
파크 픽션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언젠가 소망들이 집을 떠나 거리로 나갈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에 대해 사고한 텍스트들이 책으로부터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말로 사람들 곁에 실재하는 벗의 형태로 서려는 광경이다. 어떤 텍스트가 그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지적 계급을 방어하는 장벽으로 작용하는 대신에 실재하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려는 도구가 되어 길 위로 나서려는 시도다. 이 시도는 언제쯤 몇몇의 성공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패턴으로,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으로 정착할 수 있을까? (158쪽)
곱게 손질한 슬픔은 당의정처럼 고통의 겉에 더씌어져 그 고통을 독자들이 삼키기 쉽게 해준다. 고통은 감상을 통해 변된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감동시키는 글은 고통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하는 대신에 고통을 수단으로 삼은 다른 무엇을 바라보게(소비하게)한다. 그러면 질문은 거기서 끝나고 고통은 책을 덮는 순간 함께 덮이고 만다. (183쪽)
자기 아닌 존재에 대한 경외를, 또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마음이 채워지는 경험 없이 어른이 된 인간들로 가득한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곳이다. 인간은, 타인은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타인은 수단이고 사물이며 장애물이 된다. 이런저런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그 지경에 다다랐다면 이미 인간 외의 `것`들은 치욕스러운 꼴을 당한 지 오래일 것이다. (226쪽)
그가(미야자키 하야오)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이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아이일때만 체득할 수 있는 `나다움`이야말로 요동치는 세계를 헤쳐 나갈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다움을 간직한 채 성장한 아이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다가와도 쉽게 비틀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235쪽)
그런데 모른다는 게 답이다. 드레즈너는 모름을 인정하기야말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임을 은영중에 설파한다. (255쪽)
[일본 섹스 시네마]는 핑크 영화들끼리 또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 장르와의 연결점 역시 다양하게 제공한다. 연결점의 개수는 독자 자신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 링크들이 당장 무슨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장르내에서 `차이와 반복`을 발견하는 건 늘 재미있는 일이며, 그렇게 열린 시야는 다른 무언가를 볼 때에도 더 넒은 시각을 제공하게 마련이다. (264쪽)
삶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체계를 증거하고 그 체계는 또다시 다른 생각과 사건들을 꽃처럼 피워낸다. (285쪽)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도 막연한 애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대를, 세계를 내 안에서 전유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그러려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존재론이나 문학론의 여부를 떠나서 삶의 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02쪽)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죽음이 앗아간 것들에 대해 말할 때뿐이다. 소중한 추억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랑을 받아드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시간들, 어째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고통이 신앙에 있어 필요한 시련인가라는 물음("내게(...)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슬픔의 형태, 그렇게 형태가 달라지는 슬픔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아감인지 아니면 후퇴인지를 가늠할 수 없을 때의 혼란......이 종잡을 수 없는 조각들이 [헤아려 본 슬픔]의 전부다. (316-317쪽)
아무도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아무도 우리의 슬픔을 가늠하지 못할 것처럼, 사랑이 오직 하나이므로 죽음 역시 오직 하나일 뿐이다. (320쪽)
가장 짧은 시간과 영원한 시간 사이의 틈에는 모든 존재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정확히 지금 이 우주만큼 광활하지만 어떤 각본이나 기대나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또는 버려진) 빛들로 이루어진 `틈의 우주`다. 빛과 소리의 떨림이(또는 은총의 전달 체계가) 언어를 대체했으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의미로부터 벗어나 홀로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곳. 필립 퍼키슨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두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것들 사이로 가기. 틈의 일부가 되기.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공간, 울림, 빛, 공기, 움직임, 살모가 죽음에 조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밖으로 나가서 내`자신`을 찾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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