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단어를 마주할 때, 세상을 향하여 나 자신을 향해 연결지어서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관찰하기'가 떠올랐다. 상상의 날개로 나에게 '접목'시켜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과 현실의 틈새로 '스며드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혹당하는 게 우선이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매혹당해야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간의 많은 읽기가 그 자리에 머물러 고개만 끄덕이며 그렇구나만 반복했다는 반성도 뒤따른다. 나는 왜와 연결하여 가장 작은 단위의 질문까지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혼자가 되어 있을 거다. 그러면 지금의 상황과 연결된 대상의 본질('언제든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사물 혹은 두 대상 사이의 경험적 차이는 아니다. 본질이란 주체의 중심에 있는 어떤 최종적인 성질의 현존으로서, 주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309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본질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또 다른 생각과 사건이 된다. 책을 덮는 순간 고통을 덮으려는 시도나 너와 나의 일로 이분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게 하는 소비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세히 바라보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태도, 지속적으로 작금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괴로워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월은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를 보면서 시작했다. 알랭드보통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가 겹쳤다. 순전히 제목 때문이지만, 원제는 'take this waltz', 'the romantic movement'.
설레임이 익숙함으로 새것이 오래된 것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과 어디까지가 사랑일까라고 묻고 있는... old 한 것은 이전에 new 였음을 기억한다면, 사랑일까라는 질문은 우문에 불과하다. 떨림만 사랑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