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보트'를 타고 여행 중인 모녀의 이야기와 타인을 아는 문제와 사랑하는 문제를 전기를 쓰면서 동시에 풀어가고 있는 '너를 사랑하는 건'을 같이 읽어 나갔다. 그러면서 오랫만에 만난 그 사람과의 일이 같이 겹친다... 사라진 특별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익숙해질 수 없는 그녀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낯선 곳을 돌아다닌다. 떠날 때는 그 모든 것을 과거라는 '상자 속'에 넣어 둔다... 타인을 안다는 건 소통이 되었을 때야 가능하다. 그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 그래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그와 소통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주 오랫만에 내가 계속 말을 했다는 것, 그냥 끝없이 들어 주었다는 것, 말의 내용이 아니라 눈을 맞추고 온몸으로 들어 주었다는 것, 이게 그동안 내가 그리워했던 거다. 상자 속의 내용을 끄집어 내어 조잘조잘, 내가 가 닿은 곳은 결국엔 내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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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구판절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도 그들이 이런저런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판단을 유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는 습관, 읽고 있는 신문, 입이나 두개골의 모양, 이런 것들이 그 존재 전체의 모습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치과학이나 버스 정류장의 위치에 관해 아주 짧은 토론을 했을 뿐임에도, 그 사람이 어떻게 투표할지, 키스를 하고 싶어하는지 아닌지 예측을 한다. -51-52쪽

"사실 웃기는 일이지만, 어떤 수준에서 보자면 나는 아직 그 늙은 마녀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스물다섯 살의 '나'안의 어딘가에 여섯 살의 '나'가 아직 있는 거지. 이 어린 '나'는 어머니가 한 일 때문에 여전히 분개하고 있는 거야."-99쪽

병이 이사벨을 하룻밤 새에 평소의 기질과는 상당히 다른, 말없이 괴로워하는 갑각류 같은 존재로 바꾸어놓은 것을 보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인격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대체로 물리적 입자들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세워진 착각이며, 우리가 낙관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건강한 자아는 우리 신체 기관의 변덕에 좌우되는 다양한 괴물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인격일 뿐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23-124쪽

한 장의 레코드에는 그 레코드를 들은 여러 시기를 반영하는 몇 층의 기억이 동시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던 도시의 유적 위에 덮인 흙을 횡단면으로 자르고 들어가면 연속되는 정착지가 겹겹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142쪽

비밀이 우리 관심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로 놀랍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은 비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비밀이라는 딱지를 붙인,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비밀을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격 가운데 인류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측면들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160-161쪽

지금 그녀가 부모와 더 어른스러운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더 지혜로워졌다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독립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산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내전과 같은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듯한 공손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222쪽

자의식이 섞이지 않은 대화는 상대가 대화의 여백에 메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위엣 이루어진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헐뜯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속이 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진짜 화가 나는 것은 실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그래, 알아, 우리는 머리숱이 없고, 성질이 더럽고, 너무 밀어붙이고, 너무 수줍고, 너무 부유하고, 너무 가난하고......], 그저 사무실 소식을 주고받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 과정에서 나중에 다른 사람과 공유할 판단들을 쟁여두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244-245쪽

어떤 사람을 알려고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불확실성, 이렇게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 선별이라는 오만한 특권을 버리고 나니[어떻게 전기 작가가 신처럼 무엇을 넣고 무엇은 뺀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포함시켜야만 했다. 누가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쓰고 있는 사람의 삶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삶의 일부였다면, 당연히 삶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97쪽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친밀함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 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결혼 25년이 된 부부가 함께하는 점심시간은 양고기의 씹히는 맛, 날씨의 변화, 찬장 위 꽃병에 꽂힌 튤립의 상태, 시트를 오늘 갈 것이냐 내일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대화로 활기가 넘친다. 이 부부도 삶의 출발점에서는 의욕이 넘쳐, 서로 그림, 책, 음악, 복지국가의 역할에 관한 예리한 문답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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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보트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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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혼자 있는 것에는 익숙하다. 엄마가 주로 밤에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딱 한 번, 낮에만 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상자 속이다. '상자 속'은 엄마와 나 사이에서만 통하는 말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일, 즐거운 일도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18-19쪽

하지만 모모이 선생님은 어떤 장소를 떠나지 않는 것과 어떤 장소에 녹아드는 것은 전혀 다르단다. -자네는 통 녹아들지 않는군. 선생님은 내게 종종 그렇게 말했다. 떠나지도 않거니와 녹아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때로 주위 사람들을 고독하게 한단다. -28쪽

한 번 만나고 나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는다. 설령 그 사람과 같이 있지는 못 해도 그 사람이 여기 있다면, 하고 상상할 수는 있다. 그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할까. 그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어왔다. 상상만 해도 용기가 끓어올라 생각한 일을 혼자서도 해 낼 수 있었다. -145쪽

겨울은 생물이 모두 잠자는 계절이다. 모모이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 초입에는 꼭 감기에 걸리는 체질인데도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은 지혜와 문명이 요구되는 계절이라 그렇단다. 나는 계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나가는 데다 어차피 돌아오니까. 바깥세상은 제멋대로 변화한다.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203쪽

여름은 특별한 계절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보듬고 있는 기억, 그 하나하나가 불현듯 깨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불온하게 일렁이는 계절. 일요일. 런치 타임의 손님들이 한바탕 들이닥쳤다 간 후 카운터를 닦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창밖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218쪽

말은 위험한 것이라고 엄마는 말한다. 말이 마음을 건드렸다고 느끼면, 지금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고 느끼면 그땐 이미 '게임 오버'라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미술 선생님의 말은 정말 알기 쉽게 내 마음에 와 닿는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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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잡동사니'를 읽었다. 이사람 저사람들의 내밀한 욕망, 감정이 서로 얽히면서 모두 경계에 서있다. 다만 나하고 있을 때만이라도, 나를 알아주고, 나의 사람이었으면 모두가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모조리 가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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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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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아이를 보고 있구나." 토란 튀김을 포크로 찍으며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정색했던 것을 후회하며 덧붙였다. "예쁘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자꾸 보게 돼. 왠지 눈길이 가고 마는걸." 엄마는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말했다. "바보 같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 엄마는 샴페인을 물처럼 꿀꺽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질투잖아, 그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질투? 하지만 아직 어린애인걸, 말도 안 돼." "바로 그거야. 아이와 어른의 중간, 네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밖에 가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생명력이 저 아이에게는 있으니까."-36-37쪽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지만, 엄마는 앞으로도 쭉 미우미의 엄마고, 아빠도 쭉 미우미의 아빠야." 그 말을 듣던 날의 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I know.'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알고 있었다. 학교 수업에서도 배워 알고 있었고, 우리 반만 해도 부모가 이혼한 아이가 몇 명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엄마가 수차례 그런 뜻을 비쳤다.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도 상관없겠냐고 묻거나, 아빠나 엄마나 '순수하게' 마음 깊이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고도 했다. 그 전부를, 나는 물론 알고 있었다. -120쪽

남편을 알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애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그때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그래서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다섯 가지를 주고 남편에게서도 똑같은 것을 받았다. 고작 다섯 가지! 그것만으로 충분할, 고작 그 다섯 가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우리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몸을 섞고, 낮이고 밤이고 말을 섞고,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아 더한 속박을 바라고 소유를 바라고 질투와 말다툼을 바랐다. 서로를 모조리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존재를 바라고 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도 바랐다.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감미로움을 바라는 것과 거의 같은 크기로,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고통을 받았다. -160-161쪽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남편 목에 팔을 둘렀다. 볼과 볼을 대고 피부 냄새를 맡는다. 이제 몇 분 후면 남편은 나가버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장소로 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남편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인격을 두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힘껏 남편을 끌어안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번에 만났을 때 이 남자가 새롭게 나를 발견해주길 기도하면서.-224-225쪽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다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슈코 씨는 그때 아빠와 긴 '산책'을 나갔었다. 낮잠 잘 시간에 아빠 방에 놀러 오면 돼요. 내 말에 슈코 씨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럼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승마후, 덥고 먼지 많은 길에 앉아서. 그때 그 여자와, 지금 이렇게 하라 씨 옆에 있는 슈코 씨가 나로서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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