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도 그들이 이런저런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판단을 유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는 습관, 읽고 있는 신문, 입이나 두개골의 모양, 이런 것들이 그 존재 전체의 모습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치과학이나 버스 정류장의 위치에 관해 아주 짧은 토론을 했을 뿐임에도, 그 사람이 어떻게 투표할지, 키스를 하고 싶어하는지 아닌지 예측을 한다. -51-52쪽
"사실 웃기는 일이지만, 어떤 수준에서 보자면 나는 아직 그 늙은 마녀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스물다섯 살의 '나'안의 어딘가에 여섯 살의 '나'가 아직 있는 거지. 이 어린 '나'는 어머니가 한 일 때문에 여전히 분개하고 있는 거야."-99쪽
병이 이사벨을 하룻밤 새에 평소의 기질과는 상당히 다른, 말없이 괴로워하는 갑각류 같은 존재로 바꾸어놓은 것을 보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인격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대체로 물리적 입자들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세워진 착각이며, 우리가 낙관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건강한 자아는 우리 신체 기관의 변덕에 좌우되는 다양한 괴물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인격일 뿐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23-124쪽
한 장의 레코드에는 그 레코드를 들은 여러 시기를 반영하는 몇 층의 기억이 동시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던 도시의 유적 위에 덮인 흙을 횡단면으로 자르고 들어가면 연속되는 정착지가 겹겹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142쪽
비밀이 우리 관심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로 놀랍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은 비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비밀이라는 딱지를 붙인,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비밀을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격 가운데 인류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측면들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160-161쪽
지금 그녀가 부모와 더 어른스러운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더 지혜로워졌다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독립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산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내전과 같은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듯한 공손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222쪽
자의식이 섞이지 않은 대화는 상대가 대화의 여백에 메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위엣 이루어진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헐뜯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속이 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진짜 화가 나는 것은 실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그래, 알아, 우리는 머리숱이 없고, 성질이 더럽고, 너무 밀어붙이고, 너무 수줍고, 너무 부유하고, 너무 가난하고......], 그저 사무실 소식을 주고받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 과정에서 나중에 다른 사람과 공유할 판단들을 쟁여두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244-245쪽
어떤 사람을 알려고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불확실성, 이렇게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 선별이라는 오만한 특권을 버리고 나니[어떻게 전기 작가가 신처럼 무엇을 넣고 무엇은 뺀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포함시켜야만 했다. 누가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쓰고 있는 사람의 삶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삶의 일부였다면, 당연히 삶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97쪽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친밀함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 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결혼 25년이 된 부부가 함께하는 점심시간은 양고기의 씹히는 맛, 날씨의 변화, 찬장 위 꽃병에 꽂힌 튤립의 상태, 시트를 오늘 갈 것이냐 내일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대화로 활기가 넘친다. 이 부부도 삶의 출발점에서는 의욕이 넘쳐, 서로 그림, 책, 음악, 복지국가의 역할에 관한 예리한 문답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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