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와 네팔에 관한 여행기와 사진이 들어 있는 책에 "모독"이라는 제목은 의아했다. 우리가 낯선 곳을 가고, 여행을 할 때, 알지 못하면서 우리의 잣대로 이해하고 해독하고 폄하하는 것은 모독이고,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저자는 겸손히 말하고 있다.

여행을 할 때는 미리 알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입관 없이 가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이 더 낫다라고는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할 거 같다. 못사는 나라를 갈 때는 군림하려하고 잘사는 나라를 갈 때는 주눅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당최 떠날 때부터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다. 나의 경우다.

최근 유홍준 교수의 일본완간 기념 강연회를 다녀왔다. 일본에 대하여 관념보다는 사실과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남아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래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추상과 관념으로 막연히 알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게 얼마나 많은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직접 발로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종종 알게 되지 않는가. 눈으로 귀로 듣는 것도 체감하는 것도 실지로 다를 수 있다. 타인에 대하여 함부로 읖조리고 단정짓는 것은 정말로 모독이다.

더 나아가, 나에게 할머니의 상징은 박완서님이고, 공주의 상징은 김자옥이다. 두분다 고인이 되셨지만, 할머니가 그리울 때는 이 분의 글을 읽는다. 공주님은 너무 일찍 가셨다. 아직 완전 빙의가 되지 않은 공주로 남게 되었다. 이 분들은 내가 만든 할머니와 공주의 상으로 갖고 있는 거다. 실지의 삶은 많이 다를 거라는 거, 공주님도 자식을 키우고 맴매도 했다는 거도...

또 나아가, 친구들을 만나 서울거리를 다녔다. 아직도 갈 데가 많다는 것과 우리가 서로 닮아 있다는 것과 그래서 친구가 되었다는 점이 좋았다. 자주 만나야 알 수 있고, 그 곳을 가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공부를 하고 가든 안하고 가든 함께 여행을 가도 좋은 관계가 되었다.

또 더 나아가, 티베트는 하늘과 가장 맞닿아 있는 나라로, 네팔은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로 알고 있다. 어떤이의 입으로 전해진 블라블라 내용들 중 내가 그리던 부분과 딱 맞는 것만 기억하고 간직한다. 네팔은 꼭 한 번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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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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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무욕하고 겸손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부처와 인간, 성(聖)과 속(俗)이 헷갈렸다. 내가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저 사람들이 바로 부처로 보이고 절 안의 부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이 부처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그리도 겸손하게 갈구하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적인 욕망을 초극하려고 몸부림치듯이 저들은 저절로 주어진 성자 같은 조건을 돌파하려고 몸부리치는 게 아닐까 하고. (47쪽)

수많은 부처님 앞을 대충대충 통과하고 나서 보통의 티베트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마다 나는 으레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그들이야말로 욕망을 초극한 부처고, 사치를 극한 절 안의 부처들이 오히려 번뇌 중의 속인처엄 여겨져서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반복하는 사이에, 어떤 종교의 신이건 신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오욕(伍慾)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고정관념으로 남의 신을 보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고, 여지껏의 신관(神觀)에 다소 융통성이 생겨나고 있었다. (141쪽)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는 고개마다 있는데 고개는 바람이 통과하는 구멍 노릇도 하는 것 같다. 흔들어댈 나무도, 사람의 집문짝도, 전깃줄도 없는 바람은 허공에서 외롭게 제 목소리를 낸다. 공기 중에 흔들어댈 불순물조차 없어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바람의 정직한 목소리를 누가 들어보았는가. 수많은 신을 만들어낸 이곳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냄 없이,어떤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바람의 신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바람 소리는 바람의 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바람은 바람의 신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로 들린다. (203-205쪽)

그러니까 트레킹이란 현지인과의 친밀한 인간관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 값진 것이다. 히말라야의 무슨 무슨 봉우리를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기록적인 등반도 실은 한 등반대당 몇십 명 내지 몇백 명의 셀파를 부려야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등산 장비를 갖추고 정상에 이르러야 만족하는 본격적인 등산과 구별해서 좀 덜 모험적으로, 그러나 고되게 산을 걷는 걸 트레킹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걸 최초로 개발한 것은 네팔이라고 한다. 그 목적도 외화 부족을 해소하려는 관광 유치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네팔정부는 등산과 트레킹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6천 미터 이상의 정상을 정복하는 것을 등산으로 치고 그 이하를 걷는 걸 트레킹이라고 한다. (349~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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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에 나오는 인물은 허구라고 작가가 누누히 밝히고 있지만 계속 사실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몇 번을 나누어서 읽었다. 그 때 대학을 다녔던 나에게 불편감과 부끄러움을 떠올리게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동생들의 임금과 노동환경을 이야기 했을 때,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을 왜 받지 못하느냐고, 그리고 노동한 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으면 되지 않냐고 말했던 기억.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과정과 원인을 밝히는 자리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을 논하는 자리에서의 나의 말은 공기를 바꿔놨다. 그때 안타까워하던 리더의 눈빛과 불꽃이 피어나는 친구들의 눈빛이 부끄러움으로 올라왔다. 독서회와 YMCA, 전교조에서의 간간의 활동들은 나의 허세를 부풀려줬던 것 같다. 자꾸만 반성과 후회를 거듭하고 있는 책읽기가 부담스럽다. 반성문 쓰는 자리도 아닌데... 청동정원을 읽으면서 몇번을 멈춘 이유는 아무 희망도 없었고, 어떻게 살아야할 지도 몰랐고, 그래서 학교 다니기를 중단하고 싶었던 그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렇다고 고민을 심각하게 한 것 같지도 않았고, 생각도 할 줄 몰았던 나의 이십대 초반을 드러다 보는 게 싫어서였다. 굳이 애써서 변명하자면 요즘, 그 때 내나이의 아이들을 보면 솜털 보송보송하고 너무도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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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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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라면 또 모를까. 나는 여자니까,나보다 일찍 태어난 남자는 나의 형이 아니라 `오빠`가 맞는다. `형`은 남자 형제들끼리의 호칭 아닌가. 사전적인 정의에도 맞지 않는 야만적인 관계를 내게 강요하는 저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는 모두가 친척인 씨족사회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학생 위주로 돌아가는 대학 문화에, 위계질서가 또렷한 운동권의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언어에 아주 민감한 동물이다. (66쪽)

음식이든 책이든 한번 붙들면 뿌리를 뽑을 때까지, 지겨워질 때까지 하나에 골몰했다. 내 인생은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의 질주였다. 유년기의 극심한 허기를 경험한 자의 특징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141쪽)

불편하며 부당한 현실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그녀가 민중을 사랑하는 법을 나는 알고 싶었다. 분노를 표현하는 게 부끄럽다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정말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분노 없이 혁명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222쪽)

사회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이웃에 대한, 약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게 사회주의의 출발은 계획경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었다.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회주의에 접근한 이들에게 소련의 몰락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258쪽)

80년대가 내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서`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변할 수 있지만, 정서는 변하지 않느낟. 옷을 고르는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 말버릇이나 헤어스타일은 한번 굳어지면 평생을 간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 정의에 대한 갈증, 돈과 악수하지 않는 손, 권련게 굽실거리지 않는 허리를 그 시절은 내게 물려주었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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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막이다. 삶은 정상과 목표가 보이는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한 사막을 건너는 거라는 도나휴의 글을 읽었다. 그의 글은 세워 놓은 도달점에 이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것만 마치고, 저것을 한 후에 하면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 일, 만남을 미루고 있는 나를 멈춰 세웠다.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고 하지만, 이건 작고 소소한 일로 치부하고, 더 멀리 더 크고, 뭔가 남겨지는 일을 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주인공 샤오홍은 어땠을까. 오로지 글만 쓰기위해 애쓰고 노력하다 죽은 여자, 자식을 버린 여자, 불행한 환경과 험난한 시대에서도 굴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했던 여자...그녀를 연기한 탕웨이의 모습은 훌륭했다. 새로운 기법, 다큐같고, 책을 넘기는 듯한 천천히, 사람들을 한명씩 불러내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사라지고, 서로 중첩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었다...영화를 보면 사막을 건너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눈앞을 알 수 없는 사막을 건너고 있는 그녀는 어찌보면 철없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오아시스가 나타날 때마다 쉬었다. 예전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관계를 위하여. 캠프파이어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서는 완전 무장해제 된 채였다. 몸을 숙이고 시대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샤오쥔과의 운명적인 사랑에서도 다시 오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부르지 않았다. 실제 산다는 건 준비를 해도 하나도 필요 없을 수 있다. 그때 그때 만들어서 살아가야 한다. 샤오홍은 그 시대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것, 그녀는 자신만의 글을 쓰면서 외롭게 사막을 건넜다... 그럼 나로 돌아와서, 고착된 생각과 감정, 오기, 잘못된 믿음, 두려움등이 있다. 거기다가 적어도 나는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무지한 오만까지. 또 어제의 일은 나이와 경력때문에 주변에서 불편감을 감수했다는 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거...일단, 지금-여기에 초점 두는 거로, 산만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자꾸 불러오는 거로, 공통의 이익으로 나아가는 거로, 새로운 방식을 겸손함으로 받아 들이는 거로, 두려움과 불안은 당연한 거로, 힘들 때 친구들의 도움을 청하는 거로,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기...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편하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었으므로" (1쪽)

"우리도 사막을 사랑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 사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196쪽)   -생 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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