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같이 무욕하고 겸손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부처와 인간, 성(聖)과 속(俗)이 헷갈렸다. 내가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저 사람들이 바로 부처로 보이고 절 안의 부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이 부처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그리도 겸손하게 갈구하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적인 욕망을 초극하려고 몸부림치듯이 저들은 저절로 주어진 성자 같은 조건을 돌파하려고 몸부리치는 게 아닐까 하고. (47쪽)

수많은 부처님 앞을 대충대충 통과하고 나서 보통의 티베트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마다 나는 으레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그들이야말로 욕망을 초극한 부처고, 사치를 극한 절 안의 부처들이 오히려 번뇌 중의 속인처엄 여겨져서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반복하는 사이에, 어떤 종교의 신이건 신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오욕(伍慾)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고정관념으로 남의 신을 보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고, 여지껏의 신관(神觀)에 다소 융통성이 생겨나고 있었다. (141쪽)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는 고개마다 있는데 고개는 바람이 통과하는 구멍 노릇도 하는 것 같다. 흔들어댈 나무도, 사람의 집문짝도, 전깃줄도 없는 바람은 허공에서 외롭게 제 목소리를 낸다. 공기 중에 흔들어댈 불순물조차 없어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바람의 정직한 목소리를 누가 들어보았는가. 수많은 신을 만들어낸 이곳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냄 없이,어떤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바람의 신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바람 소리는 바람의 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바람은 바람의 신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로 들린다. (203-205쪽)

그러니까 트레킹이란 현지인과의 친밀한 인간관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 값진 것이다. 히말라야의 무슨 무슨 봉우리를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기록적인 등반도 실은 한 등반대당 몇십 명 내지 몇백 명의 셀파를 부려야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등산 장비를 갖추고 정상에 이르러야 만족하는 본격적인 등산과 구별해서 좀 덜 모험적으로, 그러나 고되게 산을 걷는 걸 트레킹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걸 최초로 개발한 것은 네팔이라고 한다. 그 목적도 외화 부족을 해소하려는 관광 유치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네팔정부는 등산과 트레킹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6천 미터 이상의 정상을 정복하는 것을 등산으로 치고 그 이하를 걷는 걸 트레킹이라고 한다. (349~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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