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 뒤의 글을 옮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고 삶은 당신의 턱에 주먹을 날릴 수 있다." 외로움에 지친 절름발이 카우보이의 슬픈 풋사랑, 냉전시대 스파이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형제의 스키여행, 싸움을 한 후에는 탱고를 추는 기묘한 부부, 엄마의 새 애인의 아들을 짝사랑하는 소녀, 안정과 신의를 버리고 새로운 사랑의 모험을 꿈꾸는 중년의 남자...일상 아래 고요히 들끓는 열망, 선택의 서스펜스가 그려내는 열한 편의 섬세한 이야기.

간결하면서 넘치지 않으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들어 있다. 엊저녁에 간 식당에서의 일과 같다. 리모델링한 식당은 서비스자체도 모두 바꾼 상태라 어리버리하게 선택하는 어려움을 계속 겪였다. 결정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까지 하는 데도, 지난 번에 너무 익숙한 상태고 조금도 유사한 게 없어서 불편했다. 선택상황에서 누군가가 계속 결정해 주고 어려운 것을 바로바로 치워주면서, 한가지가 아니라 두세가지, 최대한 많은 가지 수를 즐기게 해주고,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두 가지를 할 수 있고,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누가 한 가지만 택할까. 그런데 산다는 건 바로 한가지씩 선택하게 하는 거 같다. 그런데도 꼭 두 세가지 길에 걸치고 싶다. 이것 만의 기쁨과 저것 만의 모험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 틈새에는 아픔과 슬픔, 힘듦, 수치, 불안, 걱정들로 들어차지만, 그래도 또 다른 길앞에 서 있게 된다. 그 어떤 것을 선택해도 가보지 않는 길은 동경의 대상이 되니까. 그래도 가지 않고 후회하는 거 보다 하고서 후회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성에, 감정에, 열정에, 윤리에, 법에 어디에 초점을 두고 선택하면 될까. 그때 그때마다 다를 거 같다. 어떤 일에는 감정이 불같이 타올랐다가, 어느 때는 이성과 윤리가 지배할 때도 있으니까. 선택의 순간에는 분명 최선을 다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맛깔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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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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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운전을 해 여기에 오지 않으면 다시는 당신을 못 볼 거고, 그게 싫었을 뿐이에요. 그것뿐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언가를 말해줄지도. 어떤 절충안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기다리며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그녀를, 어느 부위이건, 어쩌면 그녀의 팔만이라도 만지고 싶었다. 허리만이라도, 그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서서 그녀는 그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2-32쪽)

그때 그녀를 거기 혼자 두고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던 것이다. 분명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는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고, 그 순간은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무기력한 부모가 아니라 정말로 한 명의 인간으로 느껴지려 할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에게 어머니의 모습은 변화하던 와중에 고정되어버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57쪽)

심지어 노인들도 그의 부모보다 더 늙었다. 이고셍 아무런 애착이 없다는 것에 조금은 슬퍼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는 자유였다. 이곳은 그가 노는물이 아니었고, 그들은 그의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82쪽)

지금, 홀로 지붕에 올라가 있는 밸런타인은 신발을 보며 빌었다. 사람들이 아예 가버리던가, 아니면 계속 머물러줬으면 좋겟다고. 왔다가 다시 가버리는 게 반복되지 말고. (182쪽)

지금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나무들이 그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제멋대로 거대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겠지만, 나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파블리노가 당황할 것이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209쪽)

조금 더 용감한 남저였다면, 아니 조금만 더 겁쟁이였다면 간단하게 떠났을 것이다. 더 행복한 남자였다면, 또는 현실에 좀더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루르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흥청거렸을 것이다. 마치 낡은 목욕가운처럼 그 익숙함으로 몸을 감싼 채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게 될 뿐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메그가 시를 써서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바모가 오직 한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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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에 쌓여 있다. 여자가 뭘 알아, 여자들이 설치고, 그런 행동을 했으니까,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늦은 밤에 왜 다니고 그래... 등등. 이건 순전히 남자들의 말이다. 여자를 남자의 소유로 생각하고, 사물로 생각할 때, 그 시절에 머물고 있는 남자들의 말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밤낮없이, 어디든, 맘대로 다니고 싶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울러 여성을 나무라는 말이 넘치는, 여자의 말을 듣기보다는 남자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이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조금 발을 떼었다. 일부 남성의 행동을 남성 전체의 행동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등등의 이야기에서 여성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남자와 여자의 일로 함께 고민해야 한다구.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이런 이야기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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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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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협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31-32쪽)

가능하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은 갖가지 만연한 폭력에 시달리고, 진을 빼고, 그러다가 가끔은 인생을 마감하기까지 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해보라. 윌가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중요한 일들에 쏟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저널리스트 중 한면은 우리 동네에서 밤중에 걸러서 귀가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비슷한 이유에서 스스로 혹은 강제로 일을 그만뒀겠는가? 온라인에서 가해지는 터무니없는 성희롱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아예 발언과 글쓰기를 그만두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61쪽)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잇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메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124-125쪽)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면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168-169쪽)

6년 전에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가르치려 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협오의 당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여성은 영원한 주제(subject)다. 이때 주제란 종속, 혹은 예속, 심지어는 속국과도 거의 같은 말이다(`subject`에는 `종속시키다`라는 뜻도 있다). 그에 비해 남자들이 행복한지 아닌지, 왜 남자들도 결혼에 실채하는지, 심지어 영화배우라도 남자들의 몸이 얼마나 멋지거나 그렇지 않은지 말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적다. 남성은 범죄의 대부분을, 특히 폭력적 범되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성이고 자살도 더 많이 한다. 미국 남성은 대학 입학 비율에서 여성에 뒤처지고 있고, 현재의 경제침체에서 여성보다 더 많이 고전하고 있다. 그러니 남성이야말로 흥미로운 탐구 주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나는 미래에는 더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논의가 앞으로 남성에 대한 더 깊은 탐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221쪽)

벌써 많은 남자들이 이 사업에 가담했으나, 이 사업이 어떻게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현재의 상태가 어떻게 남자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고민이 가능하다. 폭력, 위협, 증우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남자들-이들은 자원경찰의 기동대 격이다-에 대한 탐구도 그렇고, 그들을 부추기는 문화에 대한 탐구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탐구는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221-222쪽)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내부 지형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거시적인 패턴을 없는 셈 칠 순 없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아직껏 꼭 필요한 도구인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되찾으려는 것이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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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환대와 인정을 받은 성원이 되어 어떤 장소에 귀속되어야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문장들이다. 저자가 인용한 낯선 이들이 너무도 많아 글을 읽으면서 소외받고 외롭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아는 만큼 읽었고 쓴다. 마지막 보루의 가족마저 해체된 요즘, 공동체 성격의 사회, 공적부조의 단체에서 사람들을 불러와 기꺼운 환대로 수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배제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사물로 떨어진 상황이다. 그 사이 여성, 여자인 우리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매일 매일 다른 사람으로 받는 대접으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 어디까지 경계짓고에서 공리주의, 경제적인 이득, 그림자나 사물로 취급당하는 이들까지를 여러가지 이견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25쪽)"에서 우리는 존재만으로 사람이다라고. 닭과 계란이 누가 먼저가 아니라, 죽은자까지 우린 기억과 추억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사람으로 본다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존재만으로 사람으로 대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거기에 절대적인 타자까지 환대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이미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뜨내기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옮기는 장소마다 기억도 불어가게 마련이다. 다른 장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억은 잊어야 한다. 잠시의 직장, 사람, 감정까지. 그래서 한 곳에서 있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기 때문이니.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한 장소를 고집하는 건 아닐까.... 또한 장소와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환대, 불평등, 사람대접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모두가 평등한 그날까지, 누가, 어떻게... 어찌됐던 '사람'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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