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환대와 인정을 받은 성원이 되어 어떤 장소에 귀속되어야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문장들이다. 저자가 인용한 낯선 이들이 너무도 많아 글을 읽으면서 소외받고 외롭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아는 만큼 읽었고 쓴다. 마지막 보루의 가족마저 해체된 요즘, 공동체 성격의 사회, 공적부조의 단체에서 사람들을 불러와 기꺼운 환대로 수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배제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사물로 떨어진 상황이다. 그 사이 여성, 여자인 우리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매일 매일 다른 사람으로 받는 대접으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 어디까지 경계짓고에서 공리주의, 경제적인 이득, 그림자나 사물로 취급당하는 이들까지를 여러가지 이견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25쪽)"에서 우리는 존재만으로 사람이다라고. 닭과 계란이 누가 먼저가 아니라, 죽은자까지 우린 기억과 추억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사람으로 본다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존재만으로 사람으로 대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거기에 절대적인 타자까지 환대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이미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뜨내기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옮기는 장소마다 기억도 불어가게 마련이다. 다른 장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억은 잊어야 한다. 잠시의 직장, 사람, 감정까지. 그래서 한 곳에서 있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기 때문이니.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한 장소를 고집하는 건 아닐까.... 또한 장소와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환대, 불평등, 사람대접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모두가 평등한 그날까지, 누가, 어떻게... 어찌됐던 '사람'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