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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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협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31-32쪽)

가능하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은 갖가지 만연한 폭력에 시달리고, 진을 빼고, 그러다가 가끔은 인생을 마감하기까지 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해보라. 윌가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중요한 일들에 쏟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저널리스트 중 한면은 우리 동네에서 밤중에 걸러서 귀가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비슷한 이유에서 스스로 혹은 강제로 일을 그만뒀겠는가? 온라인에서 가해지는 터무니없는 성희롱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아예 발언과 글쓰기를 그만두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61쪽)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잇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메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124-125쪽)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면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168-169쪽)

6년 전에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가르치려 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협오의 당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여성은 영원한 주제(subject)다. 이때 주제란 종속, 혹은 예속, 심지어는 속국과도 거의 같은 말이다(`subject`에는 `종속시키다`라는 뜻도 있다). 그에 비해 남자들이 행복한지 아닌지, 왜 남자들도 결혼에 실채하는지, 심지어 영화배우라도 남자들의 몸이 얼마나 멋지거나 그렇지 않은지 말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적다. 남성은 범죄의 대부분을, 특히 폭력적 범되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성이고 자살도 더 많이 한다. 미국 남성은 대학 입학 비율에서 여성에 뒤처지고 있고, 현재의 경제침체에서 여성보다 더 많이 고전하고 있다. 그러니 남성이야말로 흥미로운 탐구 주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나는 미래에는 더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논의가 앞으로 남성에 대한 더 깊은 탐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221쪽)

벌써 많은 남자들이 이 사업에 가담했으나, 이 사업이 어떻게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현재의 상태가 어떻게 남자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고민이 가능하다. 폭력, 위협, 증우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남자들-이들은 자원경찰의 기동대 격이다-에 대한 탐구도 그렇고, 그들을 부추기는 문화에 대한 탐구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탐구는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221-222쪽)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내부 지형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거시적인 패턴을 없는 셈 칠 순 없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아직껏 꼭 필요한 도구인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되찾으려는 것이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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