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 모두에게 복된 새해 Happy New Year to Everyone - 레이먼드 카버에게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48
김연수 지음, 마야 웨스트 옮김, 전승희 외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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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에서 2받 3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는 원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봤다. 2월의 눈은 무척이나 가벼워,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쳤고 나뭇가지에 쌓였다가도 바람에 날렸다. 그런 눈이 내리는 동안 낮은 더욱 낮답게 환했고 밤은 더욱 밤답게 어두웠다. (18쪽)

"안 노래하면 안 삽니다"라는, 이 친구의 말은 음정이 틀리면 누구도 피아노를 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는 결국 죽게 된다는 뜻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서 피아노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서너 번 더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찾아와 손을 보게 되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게 이 친구의 설명이었다.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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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이야기 같은 데, 경험한 이야기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이맘 때가 되면 지금까지 구분지어 오고 규정해 온 것들, 경계를 넘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가 부질없어 진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토우가 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그렇게 아웅다웅도, 쇳소리 낼 필요도 없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울긋불긋한 얼굴색을 만들 필요도 없는데, 새로 시작되는 해가 되면 또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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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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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네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넒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13쪽)

그러나 은철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옛날 부모들이 무섭게 먹을 걸 밝혔다는 점이었다.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 하고, 가을에 앵두가 먹고 싶다 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 흰쌀밥이 먹고 싶다, 식탐이 한도 끝도 없었다. 어떤 효자는 병든 부모가 고기가 먹고 싶다 하여 자기 허벅지 살을 손바닥만 하게 잘라 맛난 양념을 하여 너비아니로 구워 올렸다 하고, 어떤 효자는 병든 부모가 소나 돼지도 아니고 콕 집어 개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개를 잡으러 나섰다가 마침 큰 개를 물고 가는 호랑이를 만나자 호랑이게게 개 대신 내 몸뚱이를 뜯어 먹고 개는 제발 나 달라고 몸부림을 쳤다고도 했다. 물론 살을 도려낸 효자의 허벅지는 금세 씻은 듯이 나았고, 호랑이 앞에서 몸부림친 효자는 심한 몸부림에 놀란 호랑이가 개를 떨구고 도망가는 바라멩 개를 메고 와 부모에게 삶아 먹여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철은 덜컥 겁이 났다. (138-139쪽)

가을이 깊어가면서 삼벌레고개에도 단풍이 한창이었다. 마당이 넓은 아랫동네 주민들은 단풍을 자랑하기 위해 서로의 정원을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도 했다. 윗동네로 갈수록 수목을 키울 공간이 없어 판잣집 주변에서는 단풍을 보기 어려웠지만, 판잣집들 너머 택지로 개발 안 된 삼악산 수목의 단풍은 아랫동네 정원의 예쁘장한 단풍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하고 수려했다. 우물가의 오래된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었다. 그러나 우물집은 여전히 못 쓰게 된 우물 안처럼 조용했다. (219쪽)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서슬이 퍼래서 당장 빨갱이 집을 쫓아내자고 설치고 다니는 통장 박가 같은 놈은 어떤 놈일 것이며, 밤마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세댁네를 어떻게 내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는 자기 남편 같은 놈은 어떤 놈일까. 같은 놈일까 다른 놈일까. 눌은 놈도 덜 된 놈도, 찔깃한 놈도 부들한 놈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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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별이 다섯개뿐이라니,  만들어서라도 더 주고 싶다. 사노요코님, 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저의 롤 모델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지금 곁에 계신다면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저도 이렇게 나이들어 갈게요! 


253-254쪽) 사노요코에 관한 옮긴이의 말을 옮겨 본다.

"섣달그믐에 쓸쓸해 보이기 싫어서 비디오도 못 빌리는 사람, 편집자에게 독설을 퍼붓고 금방 자책하는 사람, 일하는 건 딱 질색이라면서 영원히 읽힐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들어낸 사람, 암 수술 직후에도 매일 담배를 피웠던 사람, 시한부 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산 사람,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 그래서인지 자신의 죽음에도 초연했던 사람, 그럼에도 어려서 죽은 남동생을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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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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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14쪽)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자식을 키운 한창때의 일도 이처럼 뚜렷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53쪽)

정말로 다들 훌륭하다. 화창한 날씨에 읽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61쪽)

일을 의뢰받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아, 싫다,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먹고살질 못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마감 직전 혹은 마감 넘어서까지 양심의 가책과 싸워가며 버틴다. 그 전에는 아무리 한가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65쪽)

제아무리 마음이 언짢을 때라도 창밖을 보노라면 상쾌한 기분이 얼굴을 쑥 내민다.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창문을 닫으면 또 다시 금방 겉도 속도 누추한 할머니로 되돌아와 일상을 살아간다. (78쪽)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을 추억하다 보면 마음이 아릴 정도로 슬퍼진다. (88쪽)

그 나라는 미국을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툭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미국으로 사라지고, 미국에서 돌아온다. 실수로라도 일본으론 유학 오지 않는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그렇다. (121쪽)
*그 나라(한국)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126쪽)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는 난폭하고 거친 데다 기운이 넘쳤다. 그때 나는 엄마의 옹고집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자, 비로소 엄마를 용서했다. 정상일 때 용서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141쪽)

문자는 글자만 보내니까 발신할 때의 배경이나 발신자의 실체가 몽땅 사라져버린다. 전화의 경우, "여보세요"라는 말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휴대전화에는 분위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나는 문자를 통해 실체 없는 인간과 나누는 대화의 가벼움과 편안함을 깨달았다. (148쪽)

열 받는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고 하거나 장님을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호칭을 바꾼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고약한 위선이다. (173-174쪽)

그러나 지금은 무수히 많은, 정리할 수조차 없는 정보의 단편들이 나 같은 늙은이한테까지 쏟아져서 세계를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181-182쪽)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187쪽)

성장 환경이란 중요하구나. 그건 노력해봤자 몸에 배는 게 아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원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물질이 몇십 년 전부터 몸에 밴 냄새처럼 주변으로 뭉게뭉게 퍼져 나간다. (207-208쪽)

나 역시 젊은 시절, 마음만은 화사했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 화사한 생명 같은 건 완전히 잊었다.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아, 이제 남자 따윈 딱 질색이다. (220쪽)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화사한 마음이 생기면 불륜이며, 나 같은 할머니에게는 범죄나 다름없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은 다를지도 모른다. (221쪽)

젊은 시절,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꼭 교태를 부리던 그 여자는 할머니가 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아양을 떨며 남자를 밝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눈으로 보고 싶다. (231쪽)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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