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14쪽)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자식을 키운 한창때의 일도 이처럼 뚜렷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53쪽)
정말로 다들 훌륭하다. 화창한 날씨에 읽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61쪽)
일을 의뢰받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아, 싫다,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먹고살질 못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마감 직전 혹은 마감 넘어서까지 양심의 가책과 싸워가며 버틴다. 그 전에는 아무리 한가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65쪽)
제아무리 마음이 언짢을 때라도 창밖을 보노라면 상쾌한 기분이 얼굴을 쑥 내민다.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창문을 닫으면 또 다시 금방 겉도 속도 누추한 할머니로 되돌아와 일상을 살아간다. (78쪽)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을 추억하다 보면 마음이 아릴 정도로 슬퍼진다. (88쪽)
그 나라는 미국을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툭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미국으로 사라지고, 미국에서 돌아온다. 실수로라도 일본으론 유학 오지 않는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그렇다. (121쪽) *그 나라(한국)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126쪽)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는 난폭하고 거친 데다 기운이 넘쳤다. 그때 나는 엄마의 옹고집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자, 비로소 엄마를 용서했다. 정상일 때 용서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141쪽)
문자는 글자만 보내니까 발신할 때의 배경이나 발신자의 실체가 몽땅 사라져버린다. 전화의 경우, "여보세요"라는 말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휴대전화에는 분위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나는 문자를 통해 실체 없는 인간과 나누는 대화의 가벼움과 편안함을 깨달았다. (148쪽)
열 받는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고 하거나 장님을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호칭을 바꾼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고약한 위선이다. (173-174쪽)
그러나 지금은 무수히 많은, 정리할 수조차 없는 정보의 단편들이 나 같은 늙은이한테까지 쏟아져서 세계를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181-182쪽)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187쪽)
성장 환경이란 중요하구나. 그건 노력해봤자 몸에 배는 게 아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원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물질이 몇십 년 전부터 몸에 밴 냄새처럼 주변으로 뭉게뭉게 퍼져 나간다. (207-208쪽)
나 역시 젊은 시절, 마음만은 화사했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 화사한 생명 같은 건 완전히 잊었다.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아, 이제 남자 따윈 딱 질색이다. (220쪽)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화사한 마음이 생기면 불륜이며, 나 같은 할머니에게는 범죄나 다름없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은 다를지도 모른다. (221쪽)
젊은 시절,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꼭 교태를 부리던 그 여자는 할머니가 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아양을 떨며 남자를 밝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눈으로 보고 싶다. (231쪽)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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