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건조하리 만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흔히 소설속에 나오는 사랑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사랑도 있다니. 두 사람은 분명 사랑하고 있는데 - 분명 만나서 식사를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몸과 얼굴, 지금 눈앞서 만나고 있지만 얼굴도 몸도 없었다는 - 그와 그녀와 관련된 공간의 흔적을 관찰하고 서로의 아주 작은 몸짓들 속에서의 기대, 되풀이 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여덟 번의 저녁식사, 두번의 약속 취소, 그리고 여덟 번째 만남에서의 한번의 섹스.... 아홉번째 만남에서의 그의 행동은 -그녀의 피임기구에 구멍을 낸 다음, 그는 그녀와 동시에 잠들었다- 로 끝난다. 분명 벼락같은 사랑을 하게 될 거다. 사랑한다는 건 각자의 고독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하는 행위같다. 사랑한다면 그와 그녀의 온 생애를 끌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님 그와 그녀와 관련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까지 불타오르는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을 하지 않아도, 머릿 속에서는 언제나 그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수만가지 집착과 망설임을 끊고서야 그와 그녀는 만나게 되고 그제서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임에 틀림없다.
어제는 winter solstice 커피, 생각이 가장 깊어지는 겨울 동지맛을 맛보고 캐롤을 보러 갔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시간이란 요술주머니 같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반짝일 수 있고, 그 찰라를 무심히 지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우연히 만난 그녀들의 잠깐은 서로의 운명이 되고 오직 그 사람만 보게 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라고 몇번이나 말하게 된다. 그 시간 그를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은 순간의 머리가 결정한다. 아주 가까이 있는 마음이 알기 전에 이미... 그와 그녀의 사랑과 그녀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불안과 슬픔을 딛고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열애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건 아닐까?(104쪽)" 전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