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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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 최 형사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노트북 전원을 켰다. 봄이니까. 봄이니까. 최 형사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창밖에선 또 한 번 난분분,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24쪽)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26쪽)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이번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 혼잣말을 했다. 달은 좋겠다. 다음 달에도 그냥 달이어서...... 그는 그러고선 침낭 속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렸다. 서서히, 잠이 올 것 같았다. (132쪽)

아아아아, 아이는 그제야 분만실에서 들려오는 제 엄마의 목소리가 그냥 장난 같은 거였구나,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계속 비명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아아아. 우리는 너나없이 고통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란다. 아아아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속엣말을 했다. 고통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의 이름을 부여받는 거야. 아아아아. 그래서 가족이란 단어는 들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거란다. (170-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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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은 곧 '삶의 연습'이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Memento mori.(뒷 표지 글)

엄청 불편하고 답답한 주제, 죽음이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끝을 알 수 없다가 가장 우울하다. 그리고 명징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하는 부분도, 온갖 의료기의 도움으로 알 수 없는 상태로 있을 수도, 적어도 죽는구나하는 순간에서 죽고 싶다. 여기서 적어도라는 바램은 아주 큰 복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죽는 순간도 모를 수 있는데 죽은 후의 모습이 자꾸만 걱정거리로 다가오니, 이는 죽음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리라. 온전한 정신에서 깨끗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죽는다는 막연한 생각까지 생각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죽음은 절대로 그렇게 오지 않으리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니 그분들과 연결하여 읽게 되었다. 많이 아프시다면, 간병의 일과 병원 투병, 돌아 가시면 등등이 진하게 와 닿았다. 나의 경험은 이십대 이후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두세번 쓰러지고 한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정도까지 가본 나로서는 늘 지금 이순간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zero로 만들어 살고 있다. 죽음에 둘러 쌓여, 죽음을 목표로 나아가는 나날, 그래서 삶의 연습이 죽음연습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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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 잘 늙고 잘 죽는 것을 넘어 잘 사는 것에 대한 사색
이경신 지음 / 동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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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젊은이에게는 시간이 넘쳐나는 듯해서 시간의 소중함이 경시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젊은이는 시간보다 공간에 집중할지도 모른다......반면, 노인들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이 중요하다......미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니 얼마나 시간이 소중할까? 닥쳐올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픈 마음, 남아 있는 시간을 무한히 늘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하기만 미래의 시간은 과거만큼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더는 미래를 위한 계획도 힘들기만 하다. 오히려 미래라는 시간에 무관심함으로써 죽으므이 불안을 견뎌낼 힘을 얻는 쪽을 노인이 택한다고 해서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 즉 이미 생기를 잃은 과거가 그가 소유한 시간의 거의 전부가 된다. 세상이란 공간을 잃은 늙은이라면, 미래의 등을 돌리고 과거를 추억하면서 자꾸만 자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40-41쪽)

그는(스캇 펙)죽음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기 존재의 영원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자의식의 영원한 각성 상태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죽음이 영원히 잠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분면 두려워할 만하다. 그러나 죽음이 영원히 평화롭게 잠든 상태인지, 죽음 이후에도 인간 개인의 자의식이 깨어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124쪽)

그 누구도 자신이 소장하던 물건을 남김없이 써버리거나 빈틈없이 정리해두고 죽음을 맞지는 못한다.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153쪽)

생명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죽음을 통해 삶이 반복적으로 계속된다는 믿음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설사 죽음 이후 다른 삶이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은들 어떠리. (209쪽)

죽은 사람을 기릴 유족이 없다면 장례식 절차가 다 무슨 소용일까? 적어도 고인을 기억하고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장례식의 존재 의미가 잇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지막까지 개인적 욕망을 투사하는 자리가 되기보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도를 시작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 맞는 듯하다. (232쪽)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떠내려가는‘ 것과 닮은 것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사람의 일상이다. 그렇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불침번‘이다. (244쪽)

아무리 직업이 좀 더 자유롭다고 해도 죽어가는 사람의 동반을 전적으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면 어딘가에서 ‘돌봄‘을 쥐어 짜내야 한다. ‘돌봄‘이 나오는 자리는 심장처럼 부드럽기보다는 못이 박힌 발바닥처럼 딱딱할 것이다.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돌보아야 하고, 그 일을 하면서는 언제나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 -오언스, [잠들지 못하는 밤], (어머니를 돌보며)

이토록 ‘돌봄‘을 쥐어 짜내야 하는 시간 동안, 유감스럽게도 병원도 의사도 간호사도, 소위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동행해야 할지에 대해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247쪽)

적극적 안락사를 향해 도덕적.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반대할 수 있다. 의료적 연명치료에 대달리는 노인에 대해 발악을 한다면서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생의 마지막에도 개인적 선택을 존중받길 원한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운 것은 아니다. 자시느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간섭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 죽는 그 순간까지 연명치료를 받건, 인격이 붕괴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적극적 안락사를 선택하건, 그 선택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어차피 우리의 삶 자체가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도 않은 마당에 죽음만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할 까닭도 없다. 아니, 도덕적이기 어렵다. 각자의 죽음은 각자의 삶과 닮아 있을 따름이다. 제삼자는 도덕적 삶, 도덕적 죽음을 조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맞다. (304쪽)

왜 우리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험한 사회인지 물어봐야 한다. 왜 사회적 약자가 더 병들고, 더 위험한 노동에 종사해야 하고, 더 위험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에 더 노출되어야 하는지, 왜 이통록 위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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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살 되어서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문맥에 맞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 있을까. 청춘들의 넘쳐 흐르는 이야기 속에서 늙어가는 이야기도 한번 써보면 어떨까하여 썼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노년의 꿀팁이다. 전대미문의 수명으로 노령화시대로 접어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살아가는 방법조차 모르는, 청년기보다 더 긴 노년기를 보내야 하는, 또한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담담하게 노년의 삶을 들려준다. 특히, 누구에게나 할머니로밖에 볼 수없는 나이에도 여자의 매력과 성, 남자들에 관한 솔직담백한 이야기. 늙어서 좋은 점은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의 관점에서 좌지우지 되지 않고 수줍음도 사라졌다는 점. 자신의 한물간 이야기를 출판하면서 호평받은 뜻밖의 즐거움까지. 균형잡힌 시각으로 조근 조근 들려준다. 어떻게 늙을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지속적인 실천까지 다짐해 본다. 지금 하는 일을 매일같이 하면서 조금씩 늙어가며 좋겠다. 나의 삶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인생이므로 어떻게 늙을까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살다가 죽는 일이다. 그러다가 죽을 때, "신은 나를 용서해주시겠지, 그게 그분의 일이니(223쪽)"라는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좋아, 몰라도 괜찮아(224쪽)" 라고 남겨 둘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와 되돌아보니 인간의 삶이란 우주적 견지에서 보면 눈 한번 깜박이는 것보다 짧아도 그 자체로 보면 놀랍도록 넉넉해 서로 대립되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대다수 인생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양극단으로의 치우침이라기보다는 부침의 문제인 것 같고, 대개는 시작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 멈추는 듯하다.(217-218쪽)"

"개인의 삶이란 막막하리만치 하찮은데, 내가 여태껏 하고 있는 일, 생각한 것, 그리고 내가 이렇네 저렇네 하면서 쓰고 있는 이 일 역시 그렇지 않을까?(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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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늙을까 - 전설적인 편집자 다이애너 애실이 전하는 노년의 꿀팁
다이애너 애실 지음, 노상미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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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기 집에서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고 싶어 한다. (24쪽)

나는 인간이란 모름지기 젊어서는 자식을 돌보고 늙어서는 자식의 돌봄을 받는 게 자연의 이치라 생각한다. (25쪽)

`일흔이 넘었다`는 건 늙은 것이다. 나는 돌연 그 사실에 좌초해,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45쪽)

나이든 여자에게 외모는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나는 확실히 우리 할머니 세대보다 같은 나이에도 더 젊게 느끼고 더 젊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칠십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분명해진 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게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늙어 보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늙었다는 느낌이 안 들지 몰라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성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48쪽)

그 고통스럽던 밤에 내가 슬퍼한 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내 오랜 친구를 잃어서가 아니라 나의 젊음이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염병할, 그녀에게는 있지만 나한테는 더 이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갖지 못할` 젊음의 상실이 슬펐던 것이다. (61쪽)

성욕이 감퇴하면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은 다른 일들이 더 흥미로워졌다는 것이다. 성은 젊은 여성의 개성을 지워버린다. 젊은 남성들의 경우는 덜한데, 이는 남성보다 여성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성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이런 차이가 대부분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어보려 해 봤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교육은 그 차이를 강화할 뿐이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기능의 문제다. 남성은 섹스를 한 후에 등 돌리고 가버리지 못할 신체적 이유 같은 게 없다. 반면 여성은 자신이 행한 모든 섹스 행위가 평생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꿀지 모를 잠재성을 안고 있다. 남성은 그저 또다른 인간이 존재하는 데 시동을 걸 뿐이지만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 또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자기 안에 품고 좋든 싫든 그 존재와 유대를 맺어야 한다. (77-78쪽)

우리 영역 안의 삶이라는 부분, 인생이라는 그 단순한 실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신비롭고 흥미롭지 않은가? 또 삶의 잔혹함은 최소화하고 인생의 아름다움은 최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신이 우리에게 부과한 의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긴급하고 필요한 일이 아닐까? (82-83쪽)

그렇다면 글이라는 건 어떻게 작용하는 걸까? 독자의 어떤 부분이 글을 흡수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이중적인 문제일까? 그러니까 텍스트를 읽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텍스트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는 걸까? 내 생각에는 독자 내면의 결핍된 뭔가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의식적 반응의 기저나 옆에서 텍스트가 제공하는 뭔가를 취하는 것이다. (91-92쪽)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경계 안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기 때문에 모든 게 나빠질 거라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귀는 더 안 들리고, 눈은 더 침침해지고, 식욕도 갈수록 줄어드는데, 아프기는 더 많이 아프고, 친구들은 떠나고, 나도 곧 죽게 될 것이고...., 그러니 당연히 남은 인생 전반을 비관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사는 게 매우 지루해지고 그렇잖아도 쓸쓸한 말년이 더욱 쓸쓸해진다. (109-110쪽)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세련돼서 대다수가-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은 확실히 그렇다-우리 때보다 손윗사람들과 훨씬 잘 지내는 것 같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할 거라 기대하거나 동년배 치눅에게 청할 일을 그들에게 청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된다. 그드링 너그러이 베푸는 건 뭐든 즐겁게 받으시라.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112-113쪽)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속도로 나이가 드는 건 아니라서 결국 대다수는 누굴 돌보거나 누구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전자가 후자보다는 분명 낫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즐거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딱히 나만 몰랐던 건 아닐 것이다. (143-144쪽)

누구든 여든아홉 해를 되돌아본다면 후회로 점철된 풍경을 보아야만 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자기 자신의 결함과 나태, 빠뜨리고 간과한 것, 다른 사람이나 더 너은 사람들이 세운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이 세운 이상에도 미치지 못한 무수한 면모를 훤히 알게 되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분명 유감스러운 수많은 사건을 토해냈겠지만-정말이지 확실히 그렇다-내 시야에서는 사라져버렸다. 후회?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무슨 후회? 그 일들이 보이지 않는 건 상상력보다는 상식이 앞선 탓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후회란 부질없는 것이니 잊자는.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대 이상으로 계속 운이 좋다면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 되고 말지 않을까. (199쪽)

그보다는 우리가 이 세상에 거의 보이지는 않아도 실제적인 뭔가를, 유익하든 해롭든 간에 남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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