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질문 한 내용이 떠올랐다. '예수가 유월절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막힘없이 율법과 선지서를 이야기한 부분에서 어린이가 어떻게 그런 대답을 척척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이렇게 어린데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게 궁금했다. 그 후로는 교회에서의 질문은 의심과 동급이 되었고 믿음의 경중까지 나아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교회에 나가고 있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개념으로 보고, 하나님을 우리 아빠같은 개념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하지, 자식이 힘드는 것을 어찌 그냥 보고 계실까. 일부러 덫을 쳐서 기다리고, 징벌과 화만 내는 분은 절대 아니라는 것- 인지하고 있고, 천국은 현재에서 누려야 할 몫이라고... 나름의 신앙관으로 다니고 있다. 지금의 교회는 본말전도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수가 한 일을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그래서 모두가 죄의식조차 없다. 각각 따로따로 놀고 있다. 삶과 신앙의 일치가 아니라 살다가, 잠시 교회 다녀오고..., 누군가는 그랬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는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위에 교회 다니는 게 하나 더 있는 정도라고...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에는 자라면서 수없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2. 방학이 쓱 지나갔다. 읽고 싶은 책을 머리맡에 두고서는 번역만 했다. 그리고 한달간 훈련을 마친 아들을 보러갔고 -많이도 먹지 않는 애가 배가 고팠단다. ***같은 환경으로 감기가 걸려있고. 손이 트다니, 우째 이런 일이- 30년이나 지난 아빠 시대의 환경은 어디에서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 요즘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머무는 곳도 격차가 크니, 그리고 모든 것을 부모가 대신 했으니. 그러나 마음이 아팠다. 한달간 부대 홈피의 부모들이 올린 글을 읽으면서 깜놀했다. 음, 더 나아가 시어머니의 마음까지 이해했다면, 같은 여자로서 많은 것을 느꼈다. 수많은 아들들,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지고 무언가는 알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너의 삶이 무엇인지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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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길희성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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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게 일어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온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 때문이 아니다. 세상만 사랑하고 섬기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존재이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 진정한 인간 사랑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부활의 참 생명에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존재이다. (23-24쪽)

한국교회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신학의 문제이자 신학의 위기이다. 기독신앙을 대하는 태도와 이해하는 방식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답답한 성서문자주의 신앙, 경직된 교조주의 신앙,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복음주의 신앙, 그리고 저질 기복신앙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신앙의 이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37쪽)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넘어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어떤 종교도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하나님을 독점하거나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독점하고 자기 종교에 가두려는 유혹은 종교가 극복해야 할 마지막 유혹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기 절대화의 유혹은 하나님의 특수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 특히 기독교 신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91쪽)

하나님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숫자적 의미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숫자를 초월하는 의미의 하나이며, 숫자 아닌 숫자, 수를 가진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의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숫자를 가닌 모든 유한한 사물의 배후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한하고 포괄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와 여럿, 일과 다는 반대가 아니라 하나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상통한다. 하나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사물에 통하고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도록 하는 ‘무차별적 ‘ 실재이다. 유한한 사물은 모두 분명한 한계와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막힘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물과 구별해주는 차별성이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차별성이야말로 차별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을 차별화하는 하나님의 차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라는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참 뜻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한성, 무차별성을 가리킨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122쪽)

복음서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전하지 않고 그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아서 전해준 것은 실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신앙 대상인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복음의 본질적 성격, 즉 복음이 무엇인지, 무엇이 과연 기쁜 소식인지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선포한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148쪽)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은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 여하에 따라 복음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의 대속신앙에서처럼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소식에 응답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실제로 복음이 ‘되려면‘, 현실에 안주하며 살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향하는 회개와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초대에 기쁘게 응하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156쪽)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이러한 대속의 복음 이해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의 확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신자들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윤리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불의한 자, 권력자들의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보인 날카로운 윤리의식과 체제 전복적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가난하고 눌린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관심은 도외시된다. 이와 함께 예수와 같은 의로운 자들의 고난이나 피해자들의 고난도 외면당한다. 관심이 오직 예수의 대속의 죽음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달리, 속죄의 복음이 힘없는 자들의 고통과 힘 있는 자들의 불의에 눈을 감는 종교, 그야말로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160쪽)

예수의 고난은 그가 전적으로 신뢰한 ‘아빠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자유를 위해 헌신하다가 불의한 권력자들의 손에 희생되셨을 뿐이다. 그의 십자가는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가 받은 고난이었다.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무고한 피해자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그의 죽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를 다시 살리셔서 영생의 세계로 옮기셨다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165쪽)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외적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내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은 이러한 실존적 십자가의 영성을 말한다. 부활에 참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다. (186-187쪽)

예수에 따르면, 아무리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아무리 의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정당화할 자가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의인이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의인이 죄인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196쪽)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희망의 믿음이야말로 순수한 믿음이다. 어떤 증거나 기적의 징표를 통해 입증되는 강요된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와 비약이 필요한 자발적 믿음이다. 바로 이러한 자발적이고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21쪽)

나는 ‘주어진 것‘, 자기가 하지 않은 모든 것은 은혜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통해 주어진 것은 물론이고 사회를 통해 주어진 것들, 나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은 모두 은혜라는 말이다. (227쪽)

예수는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을 대변하신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참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해준 우리의 진정한 대변인이었다. (243쪽)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유혹을 받았으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252쪽)

우리에게는 죄로 인해 본래성과 현실성, 본질과 실존 사이에 괴리와 소외가 존재하는 반면, 예수는 본질과 실존이 완전히 일치하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간이 ‘된‘사람이라는 말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가져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인간 내부적으로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일으키고 인간의 자기 소외를 초래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동시에 서로 소외되고 분열된 삶을 살게 된다. (253쪽)

영적 부활이란 나의 옛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새로운 존재로서 산다는 말이다. 부활과 영생은 단지 사후에 누리는 축복이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사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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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는지, 긴 명절 내내 머리에 머문 문장이다. 인생의 모토가 뭐지. 개인의 행복이라고 누누히 말해오지만, 아울러 연대와 배려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왔다. 나름 그들과 함께 해 왔고, 도움?을 주며 살았다는 내심 조금의 뿌듯함이 목수정의 글에서는 완전히 깨진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도 닫고 살다가 나의 불편을 위해서는 기꺼이 오감을 열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다. 이 나라에 태어나 작금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는 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가족에게는. 무엇을 얼마만큼 마음과 몸을 쓰고 더 나아가 돈을 써야 할까... 아주 작은 틈새를 메우는 일, 조금이라도 예방하는 일에 마음을 두고 싶다. 화가 나서 자꾸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의식을 마비시키고 어차피 안되는 일이고, 너는 할 수 없다는 내외부 소리에 그냥 맡기고 싶다. 그러면 안돼!! 그렇다고 큰 일을 도모하자는 게 아니고 그러지도 못하지만. 최소 내가 있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공감하고, 손내밀고 그러한 작은 일부터. 제일 먼저 할 일은 말을 되도록 하지 않고 듣기부터 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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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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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담을 뛰어넘기를 포기할 날이 올 거다. 그때부터 난 팍 늙을지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더는 무엇도 새롭지 않고, 낯선 도전이나 경험을 거부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해지는 것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나의 반경을 축소하여 그 좁은 틀 안에서만 세상을 사는 것. 그리고 나를 넓히고 넓혀 세상 어디에 가든 낯섦이 껄끄럽거나 아프지 않게 되는 것. 그래서 그 낯섦을 순리로 보고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 (16-17쪽)

갈비뼈를 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리하고 멀리 달아날 것.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지막 결정적인 지점에선 묵묵히 바라만 볼 것. 자식이 맞이해야 할 고난과 역경을 부모가 대신 맞아주지 말 것. 남의 인생을 결코 대신 살아주려고 애쓰지 말 것. 남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는 자, 결국 상대의 자존을 빼앗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71쪽)

진실을 계속 덮고 거대한 거짓의 산 위에 축조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더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 진실은 힘을 잃고, 세상과 타헙할 줄 모르는 바보들의 고집스러운 선택으로 남겨지고 만다. 진실을 추적하는 삶은 그래서, 삶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삶이다. 현재의 삶을 100퍼센트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축적해온 과거의 허수들을 하나둘 걸러내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 (106쪽)

사랑은 인간이 인간을 품을 수 있게 해주는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이유이다. 인간 행동의 동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거기에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대신해줄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이다. (112쪽)

인간이 자연의 섭리대로 살던 시절에는 해가 떨어지면 일하지 않고, 추운 겨울엔 조용히 소일하며 지냈다. 인간은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았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쉼 없이 작동하는 기계로 바꿔놓은 것은 고작 1~2세기 남짓한 일이다. 그 쉼 없는 노동은 과잉 생산, 과잉 소비를 낳고 잉여 생산물은 극소수의 인간의 곳간에 축적되거나 버려진다. 파업은 인간성을 심각히 훼손당한 현대사회가 그나마 덜 미쳐 돌아가게 하도록 노동자들이 기꺼이 밟아주는 ‘브레이크‘이다. 그 브레이크마저 없다면 자본이라는 기계 속으로 인간이 빨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기계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123쪽)

선진국이란 들춰보지 않아도 약속대로 사회 구석구석이 제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그 무엇하나 법대로, 원칙대로,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고, 뒤구멍을 통해 수를 쓰면 다른 결과가 나오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독재의 기억이 비정상적인 힘, 법 이외의 관행에 의해 사회가 굴러가는 것을 내버려 둔 것 같다. (128쪽)

이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 가운데, 그 무엇 하나 사람들이 피흘리고 싸워서 얻어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 하나가 공격을 당했을 때, 거의 반사적으로 달려들어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명렬한 목소리를 낸다. (189쪽)

많은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유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독재의 사령부가 된 유럽을 반대한다. 유럽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생의 공동체로 거듭날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 사람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럽연합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개혁이 불가능한 집단임이 분명해진다면, 그 어떤 언론의 선동이 있더라고 유럽인들은 유럽연합을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231쪽)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덜 자유롭다. 떨어지기를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높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발이 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에게는, 머리를 날려 허공에 떠 있는 자들이 현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야 하는 고단한 임무가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투쟁이라 불렀다. (240쪽)

두 성인 남녀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새로운 삶을 꾸리는 결정에 대해 사회 전체가 합류하여 가치 판단에 나선다는 것은, 도덕과 윤리로 위장된 가부장제를 수호하려는 집단적 폭력이었다. 여성이 마침내 가부장제가 채워준 족쇄에서 벗어나 평등한 인류로서 세상을 함께 보듬어 나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 ‘여성 해방‘이라면, 이를 위해 남성은 ‘남성 기득권‘으로서의 가부장제를, 여성은 ‘남성이 허락해준 피난처‘로서의 가부장제를 허물어야 한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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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 사이 엄청 큰 변화가 있었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 나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그 어떤 맛도 느끼도 못하고, 소리도 웅웅대고, 말은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하니 버벅대었다. 어찌 이럴수가. 아들을 논산에 내려놓고 채석강의 일몰을 보고 바닷물이 철석대는 소리를 밤새 들으며 잠들었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오크밸리에서 부모님 생신을 축하했다. 눈내린 창밖의 경치를 통창문을 통해 보면서 바람소리 들으며 즐겼다. 눈내리는 풍경까지 좋았다. 오는 길은 느릿느릿 왔다. 부대에서 온 아들의 옷과 편지에 눈가가 촉촉하고. 분명 포상으로 했을 전화를 운전중이라 못 받은 것이 엄청 견디기 힘들었다. 보이스피싱일거라고 주변의 위로가 있었지만... 한주 후 부대 홈피에서 본 의젓한 모습, 열한명의 분대원 중에 가장 잘생긴 아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친구에게 가장멋진 군인을 찾아보라 했더니, 웬걸 모두 다 멋있단다. 얘일까? 저애일까? 하여 여기 제일 잘생긴 아들을 일러주며 씩씩대며 웃었다. 자식에 대한 콩깍지는 영원할거다. 서로가 즐겁게 견디는 바램으로 도서관을 오가고 있다. 그곳에 가면 나의 미래가 보인다. 어르신들이 많다. 오랜시간 책을 가까이 하여야만 그 자리에 오셔서 책과 마주하고 있으리라. 책냄새와 더불어 나이들고 싶다.

김영하가 말한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저성장 시대, 감성 근육으로 다져진 영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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