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게 일어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온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 때문이 아니다. 세상만 사랑하고 섬기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존재이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 진정한 인간 사랑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부활의 참 생명에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존재이다. (23-24쪽)
한국교회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신학의 문제이자 신학의 위기이다. 기독신앙을 대하는 태도와 이해하는 방식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답답한 성서문자주의 신앙, 경직된 교조주의 신앙,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복음주의 신앙, 그리고 저질 기복신앙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신앙의 이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37쪽)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넘어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어떤 종교도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하나님을 독점하거나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독점하고 자기 종교에 가두려는 유혹은 종교가 극복해야 할 마지막 유혹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기 절대화의 유혹은 하나님의 특수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 특히 기독교 신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91쪽)
하나님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숫자적 의미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숫자를 초월하는 의미의 하나이며, 숫자 아닌 숫자, 수를 가진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의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숫자를 가닌 모든 유한한 사물의 배후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한하고 포괄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와 여럿, 일과 다는 반대가 아니라 하나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상통한다. 하나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사물에 통하고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도록 하는 ‘무차별적 ‘ 실재이다. 유한한 사물은 모두 분명한 한계와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막힘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물과 구별해주는 차별성이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차별성이야말로 차별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을 차별화하는 하나님의 차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라는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참 뜻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한성, 무차별성을 가리킨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122쪽)
복음서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전하지 않고 그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아서 전해준 것은 실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신앙 대상인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복음의 본질적 성격, 즉 복음이 무엇인지, 무엇이 과연 기쁜 소식인지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선포한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148쪽)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은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 여하에 따라 복음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의 대속신앙에서처럼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소식에 응답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실제로 복음이 ‘되려면‘, 현실에 안주하며 살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향하는 회개와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초대에 기쁘게 응하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156쪽)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이러한 대속의 복음 이해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의 확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신자들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윤리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불의한 자, 권력자들의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보인 날카로운 윤리의식과 체제 전복적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가난하고 눌린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관심은 도외시된다. 이와 함께 예수와 같은 의로운 자들의 고난이나 피해자들의 고난도 외면당한다. 관심이 오직 예수의 대속의 죽음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달리, 속죄의 복음이 힘없는 자들의 고통과 힘 있는 자들의 불의에 눈을 감는 종교, 그야말로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160쪽)
예수의 고난은 그가 전적으로 신뢰한 ‘아빠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자유를 위해 헌신하다가 불의한 권력자들의 손에 희생되셨을 뿐이다. 그의 십자가는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가 받은 고난이었다.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무고한 피해자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그의 죽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를 다시 살리셔서 영생의 세계로 옮기셨다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165쪽)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외적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내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은 이러한 실존적 십자가의 영성을 말한다. 부활에 참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다. (186-187쪽)
예수에 따르면, 아무리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아무리 의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정당화할 자가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의인이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의인이 죄인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196쪽)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희망의 믿음이야말로 순수한 믿음이다. 어떤 증거나 기적의 징표를 통해 입증되는 강요된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와 비약이 필요한 자발적 믿음이다. 바로 이러한 자발적이고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21쪽)
나는 ‘주어진 것‘, 자기가 하지 않은 모든 것은 은혜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통해 주어진 것은 물론이고 사회를 통해 주어진 것들, 나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은 모두 은혜라는 말이다. (227쪽)
예수는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을 대변하신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참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해준 우리의 진정한 대변인이었다. (243쪽)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유혹을 받았으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252쪽)
우리에게는 죄로 인해 본래성과 현실성, 본질과 실존 사이에 괴리와 소외가 존재하는 반면, 예수는 본질과 실존이 완전히 일치하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간이 ‘된‘사람이라는 말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가져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인간 내부적으로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일으키고 인간의 자기 소외를 초래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동시에 서로 소외되고 분열된 삶을 살게 된다. (253쪽)
영적 부활이란 나의 옛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새로운 존재로서 산다는 말이다. 부활과 영생은 단지 사후에 누리는 축복이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사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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