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다. 공기는 뽀송하다. 가을이다. 소설을 소설처럼 읽으라는 '소설처럼'을 소설처럼 읽었다. 가끔씩 소리내어 읽었다. 글자가 살아서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오로지 책속의 글과 나 뿐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자... 책읽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만 기울이면 된다. 자꾸만 뭔가를 배우게 하고, 익히게 하고, 교육과 어른의 개입이 들어가는 순간, 책은 아이를 괴롭히는 괴물이 된다. 무엇을 어떻게 읽든 아이에게 맡겨라. 아님 책만 읽어줘라. 아무 조건 없이 기다려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다림의 길이와 깊이와 비례한다는 점을 명심해라. 더더욱 책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줘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묻지도 말고, 그냥 책만 큰소리로 읽어줘라. 제발 당부한다. 책에 나오는 글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구판절판


교육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였던가?-23쪽

"자,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 뭐지? 제대로 알아들었냐고?"
하지만 아이에게 이런 식으 질문은 그만두기로 하자. 아니 어떤 식으로도 질문은 금물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저 읽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조금씩 아이의 경계심이 풀어진다(덩달아 우리도 한결 느긋해진다). 아이의 얼굴에는 예전에 저녁 여행길에 오를 때마다 짓곤 하던 예의 그 꿈꾸는 듯한 몰입의 표정이 다시금 떠오른다. 마침내 아이는 예전의 우리를 알아본 것이다. 달라진 우리의 목소리만으로도. -72쪽

즉 언제 어디서나 학교의 역할은 요령과 기술의 습득, 주석 달기의 의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가 읽는 즐거움을 억압시킴으로써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통로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101쪽

억수같이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잦아들게 만드는 책이라는 은신처, 귀를 때릴 듯한 전철의 진동음조차 아득하게 만드는, 책장 속에서 펼쳐지는 그 소리 없는 찬란함을 생각해보라.-106쪽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들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작 책에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은 잊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한 권의 문학 작품이 발하는 막강한 위력일 터이다. 일상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드는......-112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은 어떤 책이든 큰 소리로 읽어주셨다는 사실이에요! 교수님은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열망에 단숨에 자신감을 심어주었어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신 덕분에 우리는 책의 높이에 닿을 만큼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책읽기를 가르쳐주신 분이지요!"-122-123쪽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을 아예 제쳐둠으로써, 노력에 따르는 온갖 불편함을 덜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뿐이랴. 책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온다'고 실토해버리면, 어른들이 아예 책을 읽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지 누가 알겠는가?-137쪽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그 '삶의 의무'의 닳고 닳은 상징물인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160-161쪽

책이란 우리의 아들딸이나 청소년들이 설명하라고 씌여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읽으라고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178쪽

어떤 작품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는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좋은 술과는 달리, 좋은 책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좋은 책들이 책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책들을 읽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도를 한다.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마침내 책과의 해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그 하나요,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가 또 하나다. 재차 실패했을 경우, 언젠가 다시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거기서 그만 주저앉고 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설사 내가 아직까지 [마의 산]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토마스 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205쪽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들은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 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225쪽

[옮긴이의 말]
책읽기는 목적이나 실용을 떠난 무상의 행위일 뿐이라는 것.
.......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어린아이였을 때 그랬듯이 다 큰 아이에게도, '소리내어 크게' 읽어주라고. 그것이 책읽기에서 얻는 즐거움의 근원이며 시초였다고.-23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하게 바빴다. 짬짬이 이책저책을 마구 펼쳐 읽다가 그만 두었다. 다시 읽는 국어책을 읽으니 마음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글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두근두근두근두근...... 피곤과 졸음이 왔지만 '로맨틱 크라운'을 봤다. 나이는 들었지만 사랑과 인생에 서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때 알았더라면... 오늘은 '블라인드'를 봤다. 눈을 감고 볼 수 있다면 눈을 감고 보면 딱이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안보인다고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스토리가 딱 맞다... 추억과 현재를 오갔다... '세 얼간이', '최종병기 활', '오르세미술관전'이 보고 싶다. 특히,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 한참을 서 있고 싶다. 아마도 프로방스의 목동도 별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거다. 

   썸네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시 읽는 국어책 - 고등학교
지식공작소 편집부 엮음 / 지식공작소 / 2002년 5월
장바구니담기


열일곱의 맑은 눈으로 읽어 내렸던 시와 산문들. 국어 책은 우리에게 사람과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세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것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자연과 대화하는 방법과 별을 부르는 이름과 역사를 다시 경험하는 술법에 대해 우리는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바람과 나뭇잎이 만나면 여름이 되고 매화와 백설이 마주치면 지조가 되며 소녀와 비가 만나면 추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 흔하디 흔했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3-4쪽

우리의 국토(國土)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歷史)이며, 철학(哲學)이며, 시(詩)이며, 정신(精神)입니다. 문학(文學) 아닌 채 가장 명료(明瞭)하고 정확(正確)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記錄)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磨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최남선 '국토예찬'-68쪽

우리 주위에는 총총한 별들이 마치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양 떼처럼 고분고분하게 고요히 그들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이따금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곤 했읍니다.-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님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알퐁스 도데 '별'-144쪽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163쪽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정한모 '가을에'-169쪽

요하(遼河)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만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지, 눈엔 위험한 광경(光景)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박지원 '물'-185쪽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도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因緣)'-2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안반도에 갔다. '늙어서 그래'가 화두였다. 몸이 아픈것도, 귀찮은 것도, 짜증나는 것도, 울컥하는 것도, 제자랑하는 것도, 술먹기가 힘든 것도, 벌레에게 물리는 것도... 늙어서 그렇다고 치부했다. 소나무가 지천이다. 더나무펜션도 소나무들 사이에 있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지하고 다짐도 하고 결의도 한다. 가족이 있어 좋다. 엄마 아빠 동생네들 열여섯명이 또 모였다. 우리는 가족이다. 제부도 남동생이 되고 우리는 누나가 되고, 올케는 여동생이 되고 우리는 언니가 되었다. 오빠 언니 누나 동생들이 되었다. 가구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늙는 것도 서러운데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