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떠나보내기
이승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9월
구판절판


본격적인 심리치료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내담자와의 '관계', 내담자라는 '화두'로 인해 뜨거워지기도 서늘해지기도 환희하기도 좌절하기도 한다. 고통스러워 이 직업을 그만두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를, 내 삶의 화두를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과 함께 가는 것이 내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아버렸다. 그리고 내담자들과의 분석은 내게 단순한 돈벌이로서의 전문적 활동이 아닌 삶의 본질과 접촉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 스승들이 내게 해준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 스승들이 전수해준 관계와 화두에 관한 깊은 이야기다.-6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가 아니라 공간이 아닐까요? 경계는 오직 하나의 선이어서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장벽, (투명한)차단막입니다. 따라서 경계는 관계의 균열입니다. 하지만 관계 사이의 공간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죠. 공간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때로는 물리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정서적 여유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또는 특수한 환경으로서 공간의 제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46쪽

모든 내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실 내담자들은 전혀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내담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심지어 라캉은 "내담자들은 변화하기 위해 분석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석가에세 온다."고까지 말한다. 그저 고통을 계속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써 분석가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라캉은 계속 말한다. "내담자가 정말 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내담자는 진정한 분석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진정한 결심, 과거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변화의 결심, 이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은 해결된다."-103쪽

성인이 되면 한 여자로서, 한 남자로서 인정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육체적 매력을 포함한, 한 여성으로서 인정받는 경험 말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연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 남자의 온전한 사랑을 받음으로써 여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사랑받음으로써 자기 안의 여성을 확인하며, 인정받음으로써 그가 날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연애는 아직 덜 자란 소녀와 소년을 여성과 남성으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여성, 남성이 되기도 전에 바로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되어버리는지 나는 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자신의 여성성을 언제 확인했냐는 질문을 가끔 한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았을 때'라고 답한다. 그건 어머니로서의 생산성, 모성을 확인한 것이지 여성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여성성을 확인하는 경험은 한 남자로부터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충만감을 느낄 때 가능하다. 물론 여성으로서 한 남자를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135쪽

부모와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부모에게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자신이 가치 없게 느껴진다면, 그런 못난 자신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5쪽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부모들이다. 그들의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수용적이어야 한다. 어루만지는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많은 부모들은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수용적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준다. 이것은 차선이다. 말을 걸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나 자신의 일부만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어중간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외로움은 대체로 어정쩡하다. 절절히 외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드러운 말과 어루만지는 대화와 수용되는 느낌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받을 수도 있다. -217쪽

우리는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내뱉지만, 사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하고, 그 자격 역시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준 시험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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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과 표지를 보고 황지우로 착각하고 구입하여, 그렇게 알고 읽으면서도 황지우가 참 많이도 변했구나하면서 저자를 다시 확인하니 황동규였다. 이럴수가... 순전히 겉모습에서 착각을 하였다... '기다림이 없으면 끄트머리도 없지요(p38)',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있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하는군요(p54)'가 오늘의 화두다. 오해와 불통으로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끊어야 하는 건 힘든 일이다. 긴 시간의 감정의 찌꺼기까지 올라오면서 남의 차를 긁기도 하고, 버스와 부딪힐 뻔한 일까지, 하루가 무척 길었다. 겨울밤 0시 5분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기다리면서 결국 사라지게 될 혜성까지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래도 온다면야 희망이라도 있지, 과연 올까를 마음 속으로 재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다림의 이유는 뭘까... 기다림이 없다면 끝이 없으니까. 막차가 온다는 걸 안다는 건 설레게 하니까. 결국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림 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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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구판절판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中-10쪽

있는 것과 가는 것이
서로 감싸고도는 고요,
때늦은 수국과 웃자란 풀들이 마음대로 시들고
사람들이 목젖에서 끄집어내며 여미는 소리
문득 빈 말이 된다.

-이런고요 中-12쪽

세상에 헛발질해본 사람이면 알지,
저 소리,
밖으로 내놓지 않고 마냥 안으로 끌어만 당기는
저 음성.
'이 저녁 견딜 만하신가?'

-늦가을 저녁 비 中-14쪽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겨울밤 0시 5분 中-21-22쪽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삶의 맛 中-29쪽

그냥 초록도 아니고 빛나는 연초록도 아닌
그 둘을 보태고 뺀 것도 아닌
초록 불길 속에서 막 나온 초록 불길 같은,
슬픔마저 빼앗긴 밝은 슬픔 같은,
이런 색깔이 이 세상 어딘엔가 있었구나.

-안성 석남사 뒤뜰 中
-67쪽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는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 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헛헛한 웃음 中-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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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비오는 길위엔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참을 걸려 왔다.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기 위한 연수... 동일한 주제로 강사만 다르다. 늦게까지 책읽은 덕에 강의내내 졸다가 낙서하다가 황지우의 시를 읽으면서 다섯시까지 있었다. 난 원하는 게 이런 것이고, 너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인데, 서로의 눈으로 보면 한참이나 다르다. 상대적이다. 우린 원하는 걸 얻지 못하거나, 채워지지 않으면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다. '공중그네'에는 우리의 페르소나 뒤에 감춰진 얼굴들이 고스란히 나오고 있다. 경계와 강도强度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어쩔 줄 모르는 우리들이 나온다. 정신과의사 이라부의 종횡무진한 처방으로 요절복통하며 낫게되는 과정이 유쾌하다. 개인의 삶이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나의 의지와 선택, 타인의 호의와 예민함과 인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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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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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라, 이라부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세이지의 인생은 고슴도치 그 자체였다. 열두 살 때부터 어깨에 힘을 넣고 다니기 시작했고, 이날 이때까지 상대를 위협하며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정학을 먹어 더 이상 나팔바지를 입고 활개 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지금도 기성복 양복에 카롤러(도요타의 인기 차종)를 타면 똑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하기야, 야쿠자는 모두 그렇다. 자기뿐만이 아니다. -31쪽

"중요한 건 훈련입니다. 지상 5센티미터 높이에서 건너는 평균대를 지상 10미터에서도 건널 수 있느냐, 그게 일반 사람과 서커스 단원의 차이니까 넘어서야 할 건 기술이라기보다 오히려 공포감이라고 해야겠죠."-79쪽

뻔뻔스러운 인간은 그 뻔뻔스러움을 주위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게 만듦으로써, 점점 더 뻔뻔스럽게 변해간다. -151쪽

자유라는 건 분명 자기 손으로 붙잡는 것이다. -162쪽

"선생님, 자꾸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강박증 치료도 생각 좀 해보세요."
"맞다, 그렇지." 머리를 긁적거린다. "구토증하고 근본 원인은 같으니까, 다른 걸로 분출해버리면 좋을 거 같은데."
"다른 거요?"
"정작 토해내야 할 감정들을 쌓아두고 있으니까, 위 속에 든 음식이 대신 나와버리는 거잖아. 강박증도 그 연장선상이지. 한밤중에 베란다에 서서 허공에 대고 다른 사람 욕이라도 실컷 떠들어보면 어떨까?"-273-274쪽

인간의 보물은 말이다. 한순간에 사람을 다시 일으켜주는 게 말이다. 그런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 신에게 감사하자.-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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