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품절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中-10쪽

있는 것과 가는 것이
서로 감싸고도는 고요,
때늦은 수국과 웃자란 풀들이 마음대로 시들고
사람들이 목젖에서 끄집어내며 여미는 소리
문득 빈 말이 된다.

-이런고요 中-12쪽

세상에 헛발질해본 사람이면 알지,
저 소리,
밖으로 내놓지 않고 마냥 안으로 끌어만 당기는
저 음성.
'이 저녁 견딜 만하신가?'

-늦가을 저녁 비 中-14쪽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겨울밤 0시 5분 中-21-22쪽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삶의 맛 中-29쪽

그냥 초록도 아니고 빛나는 연초록도 아닌
그 둘을 보태고 뺀 것도 아닌
초록 불길 속에서 막 나온 초록 불길 같은,
슬픔마저 빼앗긴 밝은 슬픔 같은,
이런 색깔이 이 세상 어딘엔가 있었구나.

-안성 석남사 뒤뜰 中
-67쪽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는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 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헛헛한 웃음 中-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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