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건성으로 읽었다. 역사속에서 세상속에서 한 획을 그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아주 적은 내용에 불과했다. 그리고 책 내용에 성큼 빠져들지 못했다. 여자를 보는 나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흐리고 비가오는 날이 많다. 영화 '잭 리처'를 재밌게 봤다. 과거의 서부영화와 다를 바 없다. 검사, 경찰, 변호사가 있지만 영웅적인 한 개인이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떠난다. 그대가 필요할 때 언제든 나타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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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 역사를 움직인 33인의 여성 리더
김정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1년 4월
절판


세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은 1893년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인정되었고 그 뒤를 이어 1920년에 미국, 1928년에 영국, 1944년에 프랑스에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948년의 일이다. 올바른 여성 참정권의 역사는 아직 백 년을 넘지 못했다.-87쪽

샤넬은 여성 옷의 코르셋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약간의 곡선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헐렁하며 움직임이 자유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이 옷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샤넬은 1920년 이른바 '샤넬 라인'으로 알려진 무릎 밑 5~10센티미터까지만 오는 길이의 스커트를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 옷에서 다리를 드러낸 것은 샤넬의 옷이 최초였다. -171쪽

영국 국왕은 내각에 정치의 대부분을 내어 주며 왕은 군주의 위엄과 권위, 카리스마만 가진다. 국왕의 위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왕이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통치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기꺼이 내주어야 하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왕들은 끝까지 자신의 권위와 권리를 붙잡고 있다가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315쪽

위정자와 그 측근의 무능과 무지는 오랫동안 백성을 괴롭히는 칼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 칼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저 화려한 궁중의 아름다운 꽃으로만 살고 싶어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단두대에 오르면서까지도 자신의 진짜 죄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 대해 하나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죄로 죽었다.-398-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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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서 뿐 아니라 물건, 사람, 추상적인 것에 밀착되어 자신이 파괴될 정도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 가는 이들이 많다. 음식과의 불편한 관계는 또 다른 허기를 채우려는 저자의 노력이고 삶의 한 방법이었다. 저자는 좋아하는 음식부터 출발하여 그 음식이 어떻게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지를 알아가기 위하여 일일이 찾아가고, 보고, 맛본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도 화해를 하고 자신의 몸과도 화해를 한다. 그러면서 음식의 소중함을 알고, 음식과 몸은 하나 임을 알고,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먹는 것도, 그만 먹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음식, 물건, 사람 등을 대할 때 사용되는 에너지는 집착일 뿐 아니라 소비도 된다. 점점 줄여나가는 부분을 택한 저자는 그게 행복의 비결이라고 결론 내린다... 저자가 음식을 얼마나 맛있게 먹고, 먹고 싶어 하는지 글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나는 물건에 집착을 많이 한다.     

-영화 'life of pi' 를 보았다. 환상적이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믿음과 이성... "믿음이 뭐예요?" "종교보다는 너의 이성을 믿어라." "삶이란 그런거죠. 무언가를 끊임없이 흘러보내는 것.  그래서 가장 아픈 건 작별인사를 못하는 게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가요?"   

-'비폭력대화' 교육을 받았다. 관찰하고 사실만 이야기하도록 노력하기. 생각(평가, 판단)보다는 느낌으로 말하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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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여행 끝에서 자유를 얻다 - 마음으로 몸을 살린 어느 탐식가의 여정
데이나 메이시 지음, 이유미 옮김 / 북돋움 / 2012년 6월
절판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몸매도, 완벽하게 먹는 법도 아니다. 더 나은 건강, 더 큰 마음의 평화, 내 외모 안에서 나를 평온하게 해줄 음식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원하는 것이다. 중년에 이른 지금, 나는 음식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내적인 자유에 굶주려 있다. -17쪽

알고 있다. 슬림짐(짜고 질긴 싸구려 육포-옮긴이)을 한 상자 다 먹어치우고는 있지만, 이 음식이 나에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하지만 소금과 지방과 설탕의 조합은 마치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그 질긴 스틱형 스낵을 씹을 때면 나 자신과 우리 가족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슬픔, 당혹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곤 한다. -27쪽

"음식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자라는지를 이해한다면, 건강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텐데 말이에요. 만물은 생태계와 계절과의 연계 속에서 살아가지요. 자신이 먹는 음식의 원천과, 가족의 내력에 더 깊이 연결될수록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에도 더 깊숙이 연결된답니다."-87쪽

신체 밖에서 음식을 낭비하는 건 신체 내에서 음식을 낭비하는 것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음식을 소중히 하세요.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요. 음식을 소중히 하는 건 당신 자신, 당신의 생각과 느낌, 그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107-108쪽

내가 어린 소녀였던 시절에는 냉동식품과 통조림 식품이 표준 규범이었다. 그런 식품의 미덕 중에는 여성을 주방으로부터 해방시켜 바깥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도 있었다. 분명히 큰 장점이었다. 우리 문화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니까. 따라서 여성도 자기 돈을 벌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포장식품과 패스트푸드가 표준이 되면서 성별을 불문하고 요리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늘어갔다. 좋은 영양을 공급하는 방식이 사라져감과 동시에 생에 관한 지식들도 유실되어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 과학이란 어떻게 먹을지 알려면 음식을 정량의 영양 요소로 분해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영양 성분을 하나하나 분리시켜서 알약 형태로 삼키고 나면 음식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얘기는 믿지 않았다. -118쪽

뒤뜰 가득한 음식들, 그것들은 어째서 식탁에 오르지 않는 것일까? 이윽고 깨닫는다. 정원에 작물들이 넘쳐흐르는데도, 노부인은 자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음식을 우리에게 대접하고 있는 것이다. 통조림 음식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것이다. 그건 슈퍼마켓에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돈이 드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재배할 수 있는 것보다는 구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더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이 음식은 그녀의 성의다. 나는 그걸 이해한다. -143-144쪽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것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마음에서 몸으로 이해를 옮겨가는 방법들 가운데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주의집중과 연습이다. -275쪽

체중을 줄이는 것도 다르지 않다. 트라플크림 캄보졸라 치즈 30그램이 적은 양일 수도 있다. 하지만 30그램은 30그램이다. 쌀 한 컵은 쌀 한컵이다. 꿈에 나온 가수가 "비결은 '비결이 없다'는 사실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뜻한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1인분은 1인분이다. 그리고 연습은 연습이다.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량은 그 속성상 모든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계량은 내 갈망이 담길 곳, 내 열망이 가닿을 경계선을 설절해준다. 경계선이 없다면 균형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한계가 없다면 자유로워지길 바랄 수도 없을 것이다. -278쪽

세상에 굶주림의 위기가 존재하듯이, 뭔가를 갈망하는 욕망의 위기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뭔가는 음식, 물건, 관심, 숭배 등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더 원하는 데에는 끝이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다면. 균형을 찾기 위한 나의 탐색은 음식을 넘어 확장되었다. 내가 집착하는 모든 것과 내가 소비하는 모든 것으로까지 뻗어나갔다. 어떤 것들에 대해 나는 "노"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만 다른 것들에 대해 "예스"라고 말할 수가 있게 되니까. 소비를 하겠다는 모든 결정은 내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관심을 투입하겠다는 선택이다. 어쩌면 더 많이 갖는 게 아니라 필요한 걸 줄이는 것이야말로 더 행복해지는 비결 중 하나일지도 모르게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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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픔의 글이 잔잔한 호수 같다. 정말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 사라짐에 대한 감정은 살아있는 자에게 슬픔으로 되살아 온다. 공간적인 허전함 뿐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적인 부분까지 자극을 한다. 슬픔이 올 때는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면 된다. 슬픔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까...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건 아니였는데.... 누구든 슬픔을 대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슬픔에 휘둘리지 않는.

2. 정초부터 구설수(?)에 휘말려 몇달이 지난 것 같다... 수많은 말, 말, 말이, 분명 따뜻하고 위로의 말이였는데, 돌아온 건 각각의 말들이 합쳐서 커다란 돌덩이로 왔다...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교류를 한다는 것의 경계를 다시 한번 생각했고, 말 또한 조심보다는 나을 게 없다란, 그러면 한 공간에서 일을 하면서 숨소리만 내고 지내야 할까. 참으로 팍팍하다. 아무리 일을 못했을지라도 떠나는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였을까. 그들에겐 가식이었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3. 슬픔의 위로, 슬픔과 위로는 반대의 뜻같다. 슬픔을 당한 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의 시점도, 위로의 표현도 기준이 없으니, 가장 좋은 건 그때 마음에 떠오르는 말을 하는 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설수에 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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