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몸.몸. 봄.봄.봄.... 고미숙은 사람의 신체와 우주가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공부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고전을 통하여 힘을 기르고 지혜를 얻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일러준다. 우리 몸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원하는 '돈'은 소비와 소외, 결핍과 불안을 불러오고, 딱 쓸만큼만 강조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능력이 가장 큰 복임을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최고의 대안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어울린다는 공부를 통하여, 자신과 더불어 최고의 삶을 살수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주인이라 여긴다면, 누군가에게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린 스스로를 소비자로 규정하기에 배려받으려 하고, 그러기에 그 어느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한다. 각자의 삶과 현장에서 주인이 되는 것, 나와 너, 몸과 우주는 분리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소통이 가능하리라. 삶이 바뀌리라. 그럼 몸이 열리고, 대화가 열리면 숨쉬기가 편하리라. 요즘은 돈까지 써가면 스스로를 가두려고 노력하는 거 같다...윗사람이 바뀌면서 몇일씩 걸리던 일처리가 금방 마무리 된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감정소모가 없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만 멈칫하게 된다. 당연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마음이 평온하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불편한 감정 걷어내기.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삶이란 자신을 지속적으로 들여다 보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다란 생각이 든다. 봄날이다. 자꾸 창가로 간다. 몸이 느끼는 봄날과 마음이 느끼는 봄날의 간극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이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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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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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사물과 사람들의 울퉁불퉁한 측면들을 제거함녀서 출발했다. 궁극적으로 자연의 불가사의하고 생기발랄한 지층들을 말끔하게 밀어내고자 한 것이다.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우는 부모함을 연상하면 된다. 성형 또한 그 연속이자 정점이다. -20쪽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21쪽

사랑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니체는 말했다.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고. 그러니 기억하라! 첫사랑의 판타지는 생이 마련한 수많은 행운 가운데 가장 '소박하고 유치한' 항목에 불과하다는 것을. -78쪽

사랑이란 '나를 버리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특별한' 사건이다. 헌데, 나는 상대를 거절할 수 있어도 상대는 나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참 희한한 규칙 아닌가. 그러다 보니 사랑 자체보다 '밀당'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되고 결국엔 누가 찼는지(혹은 차였는지)가 관건이 되곤 한다. 본말전도!-90쪽

탁타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나무를 오해 살게 하거나 잘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나무의 섭리에 따라 그 본성에 이르게만 할 뿐입니다. 본성이한 뿌리는 펼쳐지려 하고, 흙은 단단하게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준 뒤에는 건드리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며, 다시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탁타가 보기에 다른 이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뿌리를 뭉치게 할 뿐 아니라 흙을 돋아줄 때도 지나치게 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한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침에 들여다보고, 저녁 때 어루만진다. 심지어 나무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보고 살았는지 말라 죽었는지 시험하고, 뿌리를 흔들어서는 흙이 단단한지 부실한지 관찰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나무가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려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리얼하다. 마치 우리 시대 '조기교육' 풍토를 풍자하기 위해 쓴 글처럼 보일 정도다.-142-143쪽

요컨대 자신을 대면하는 일과 타자와 공명하고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 가는 일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적으로 함께 간다. 이 동시성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175쪽

팔자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엇박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스텝이 꼬이면 강밀도(intensity) 역시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강밀도는 각각의 리듬에 변화와 개성을 부여하는 진동 혹은 임팩트다. 그 기준은 청정함이다. 청정하다는 건 말과 행동, 명분과 실상, 앎과 삶 사이의 간극이 없음을 의미한다. 간극이 없어야 다음 스텝으로 경쾌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자율성이다. 자율성이란 발산과 수렴을 스스로 조율하는 힘에 다름 아니다. 다양성의 시공간이 열리는 것도 그 속에서다. 고로, 인생과 우주의 원칙은 간단하다. - 리듬을 타고 강밀도를 높여라!-222-223쪽

정보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하여. 고독과 소외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하여 등등.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고? 암송과 연극, 필사와 구술 등 고전의 입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런 과정을 밟아가다 보면 최후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전의 지혜와 나의 몸이 '화학적으로 융합되는' 절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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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를 통하여 나만의 욕망을 들여다 봤다. 제어하지 못하고, 한없이 망설이는 주인공들을 통해 나의 또다른 이면을 본다. '나는 왜 이럴까?'를 나만 그렇다로 반복해 보지만, 누구나 질문한다는 것으로, 그 과정이 나의 문제이고 욕망이기에 특별하다는 것으로 고전을 통해 새삼 발견한다. "햄릿이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 할 때는 망설이고 결행을 지연하지만, 'let be(순리를 따라야지)'할 때는 비로소 행동하게 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p152)" 내속의 내가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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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품절


그리고 이 책에서 저는 고전을 최대한 우리 가까이에 갖다놓고 싶었습니다. 가까이 갖다놓는다는 게 집 현관에 갖다놓거나 부엌에 갖다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품이 갖는 보편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발견은 자기 발견의 구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햄릿이다', '나는 돈키호테다', '나는 보봐리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자가 자기 안의 햄릿과 돈키호테와 파우스트와 돈 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배합비율까지도 예민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이 주인공들이 바로 근대인의 전형적 초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와 탄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전이 갖는 현재성이라고 생각합니다.-7-8쪽

엠마는 욕망을 채우려고 했지만, 이게 거의 화수분 수준이라 충족하지 못한 채 삶을 탕진하게 됩니다. 아무리 돈을 써도 충족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구는 채우되 욕망은 버리라는 것이 구태의연할지라도 지혜로운 대답이겠지요. 하지만 이성복 시인의 시에서 나오듯이 욕망이 없다면 이 삶이 얼마나 단조로울까요? 우리는 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엠마의 욕망하는 삶이 비난받을 만하다면, 별 욕망이 없는 샤를르의 아주 단조로운, 그저 욕구만 있는 삶이 바람직한지 혹은 지혜로운 건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욕망에 대해 남긴 교훈입니다. "무엇을 위해 저잣거리를 헤매는가? 삶이란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단순하게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마담 보봐리]라는 긴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느낀다면 읽어볼 수 있습니다.-43쪽

"아무리 가장 행복한 여성일지라도 여성으로서의 삶이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연 행복한 여성, 불행한 여성이 따로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되죠. 불행한 여성은 그렇다 쳐도 행복한 여성은 그래도 살 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성의 삶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전에는 행복한 여성은 그래도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대단히 도전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첫 단계로 사회조직을 모두 깨부수어 새로이 세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남성의 천성 자체나 오랫동안에 걸쳐 천성이 되다시피 한 유전적인 습관을 여성도 정당하고 적절한 지위 비슷한 것이나마 차지하게 될 때까지 뿌리째 뜯어고쳐야 한다." 이것이 헤스터 프린의 '여성 해방론'입니다. -73-74쪽

"한 여자와 제대로 관계를 맺느냐?" 이게 인생의 핵심 문제입니다. 그럼 전쟁도 없다는 거죠. 좀 과도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요즘 나오는 어떤 심리한 책에는 젊은 남자들이 욕구를 풀지 못해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욕구해소가 안 되니 그게 공격적 본능으로 발산된다는 거예요. 멜러즈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나는 한 여자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얻고 싶었던 것이고,또 그것을 결코 얻지 못했던 것이오. 왜냐하면 여자가 나에게서 즐거움과 만족을 똑같이 얻지 못할 때 나도 그녀에게서 그것들을 결코 엳을 수가 없기 때문이요." 이게 핵심이에요. 로렌스의 성에 대한 생각의 핵심은 진정한 만족은 어느 한쪽만의 만족으로 얻을 수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만족이란 상대방의 만족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두 사람이 일치돼야 하는데, 이건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코니나 멜러즈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로랜스의 핵심적인 성애관이 나옵니다. "남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성행위를 하고 여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그걸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고 나는 믿고 있소."-121-122쪽

햄릿의 복수가 왜 지연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프로이트적인 해석부터 법률가적인 해석, 해석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해석도 있습니다. 작품을 읽는다는 건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햄릿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가 왜 복수를 지연시키는지 알아야겠지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이해해보고자 한다면 거쳐야 하는 문제가 많습니다.-139-140쪽

돈키호테의 태도는 '이상이라는 게 이미 사라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고수하겠다'라는 쪽에 가까운데, 이건 그 이상이 진실이라고 '믿는'태도와는 좀 다릅니다. 그게 진짜라고 믿는 것과, 그게 허상이고 이미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즉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태도죠. 산초 같은 현실주의자는 오직 하나의 현실 하나만 갖고 있어요. 투구와 세숫대야 중 세숫대야의 세계만 갖고 있는데 보통은 그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양면적입니다. 멀쩡한 정신의 우리들도 이건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돈키호테는 둘시네아에 대한 기사도적 사랑에 빠져 있지만, 보통 사람들도 사랑에 빠지면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 남자가, 혹은 그 여자가 평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죠. 물론 심하게 빠져 있다면 "네 눈에는 저 사람이 평범해 보이냐?"라고 발끈할 수도 있죠. 하지만 보통 "네 눈에 평범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게는 특별해 보여"라고 생각하죠. 과연 이게 광기일까요?-180-181쪽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문제입니다.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걸 갖게 된 그 순간에, '딴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건 만족감이 다 채우지 못한 빈틈 같은 겁니다. 그 틈새를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점점 커지고 권태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게 파우스트의 병입니다. 푸슈킨은 문학작품을 통해 학습한 '권태'를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통해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생각의 과잉', '의식의 과잉'에 의한 권태가 근대적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205쪽

돈 후안주의란 현재의 충만을 근거로 해서 미래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심판을 거부하거나 간과하는 태도입니다. 현재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실상 현재란 '지나가는 것'입니다. 청춘도 기분상으로는 영원할 것 같지만, 지나가고 있거나 이미 지나갔지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돈 후안주의는 시간의 힘에 대해서 간과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요. 다르게 말하면 돈 후안주의는 현재의 젊음, 젊음의 현재를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제약 없는 것으로 숭배하고 예찬하는 태도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그에 비하면 돈 후안의 여성 편력이라든가 쾌락주의라는 건 부차적으로 따라붙는 겁니다. 푸슈킨의 '여성 돈 후안' 라우라의 남성 편력이 말해주는 것도 그런 거죠. 하지만 퓨수킨은 이런 식의 '젊은 지상주의'가 갖는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고, 돈 카를로수와의 대사에게 이미 그걸 이야기합니다.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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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게 꿈인가? 꿈 이겠지. 꿈 일거야...

바램이다... 꿈이라고 치부하고 싶다...

아들은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균형잡기가 힘들었다...

온갖 감정들이 올라왔다. 나의 양육방식, 태도, 결정들에 대한 각각의 감정들과 또 싸워야 했다.

그때는 최선이었고, 최고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뤄지지 못한 소원이 위장된 모습으로 꿈으로 나타나리라. 꿈을 자주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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