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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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사물과 사람들의 울퉁불퉁한 측면들을 제거함녀서 출발했다. 궁극적으로 자연의 불가사의하고 생기발랄한 지층들을 말끔하게 밀어내고자 한 것이다.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우는 부모함을 연상하면 된다. 성형 또한 그 연속이자 정점이다. -20쪽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21쪽

사랑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니체는 말했다.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고. 그러니 기억하라! 첫사랑의 판타지는 생이 마련한 수많은 행운 가운데 가장 '소박하고 유치한' 항목에 불과하다는 것을. -78쪽

사랑이란 '나를 버리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특별한' 사건이다. 헌데, 나는 상대를 거절할 수 있어도 상대는 나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참 희한한 규칙 아닌가. 그러다 보니 사랑 자체보다 '밀당'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되고 결국엔 누가 찼는지(혹은 차였는지)가 관건이 되곤 한다. 본말전도!-90쪽

탁타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나무를 오해 살게 하거나 잘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나무의 섭리에 따라 그 본성에 이르게만 할 뿐입니다. 본성이한 뿌리는 펼쳐지려 하고, 흙은 단단하게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준 뒤에는 건드리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며, 다시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탁타가 보기에 다른 이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뿌리를 뭉치게 할 뿐 아니라 흙을 돋아줄 때도 지나치게 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한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침에 들여다보고, 저녁 때 어루만진다. 심지어 나무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보고 살았는지 말라 죽었는지 시험하고, 뿌리를 흔들어서는 흙이 단단한지 부실한지 관찰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나무가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려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리얼하다. 마치 우리 시대 '조기교육' 풍토를 풍자하기 위해 쓴 글처럼 보일 정도다.-142-143쪽

요컨대 자신을 대면하는 일과 타자와 공명하고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 가는 일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적으로 함께 간다. 이 동시성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175쪽

팔자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엇박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스텝이 꼬이면 강밀도(intensity) 역시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강밀도는 각각의 리듬에 변화와 개성을 부여하는 진동 혹은 임팩트다. 그 기준은 청정함이다. 청정하다는 건 말과 행동, 명분과 실상, 앎과 삶 사이의 간극이 없음을 의미한다. 간극이 없어야 다음 스텝으로 경쾌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자율성이다. 자율성이란 발산과 수렴을 스스로 조율하는 힘에 다름 아니다. 다양성의 시공간이 열리는 것도 그 속에서다. 고로, 인생과 우주의 원칙은 간단하다. - 리듬을 타고 강밀도를 높여라!-222-223쪽

정보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하여. 고독과 소외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하여 등등.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고? 암송과 연극, 필사와 구술 등 고전의 입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런 과정을 밟아가다 보면 최후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전의 지혜와 나의 몸이 '화학적으로 융합되는' 절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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