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교양 - 3천년 인문학의 보고, 성서를 읽는다
크리스틴 스웬슨 지음, 김동혁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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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사람들이 믿는 바(또는 안 믿는 바)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전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하여 성서를 더 잘 이해하고 성서를 교양 있게 대하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또 성서에서 온 표현이다 개념을 더 잘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돕고, 왜 사람들이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쉽게 흥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12쪽)

오늘날의 성서를 이루는 내용 중 대부분은 책이란 것이 존재하기 이전, 즉 사람들 대다수가 글을 읽을 줄 알기 이전부터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성서 이전의 본문들은 대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문서들이었는데, 많은 경우는 옛 구두 전승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이런 성서 이전의 본문들이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소수 엘리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쓰이고 편집.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21쪽)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이 바울이 기원후 50년경에 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데살로니가전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20년 뒤인 기원후 70년경에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 사후 한 세대(40년)를 채운 뒤의 일이었다. (51쪽)

안타깝게도 성서가 말해 주는 역사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문을 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72-73쪽)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사용했던 히브리 성서는 ‘히브리어‘도 아니었고 ‘성서‘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직 고정되지 않은, 경전의 지위를 얻지 못한, 히브리어 두루마리들의 그리스어 번역을 그들의 성서로 사용하였다. 또 하나는 예수를 처음 따르는 이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 모두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그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102쪽)

예수의 특별한 본성에 대한 믿음, 즉 예수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든 분이라는 그 믿음이 신약의 저자들로 하여금 붓을 들게 했다. 그들은 예수의 일대기(복음서들)을 쓰고, 교회의 역사(사도행전)를 쓰고, 구너고, 교훈, 격려의 편지(그 외의 책들)를 썼다. (267쪽)

사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해 말하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특별한 본성, 즉 신인 동시에 인간인 근원적 독특성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밝히는 데에 힘을 집중하였다.....그가 전한 것은 부활한 메시야,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수의 특정한 행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 말이다. (277-278쪽)

성서는 가부장적 문화와 사고방식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렇기 대문에 성서 본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영향 아래 있던 저자들이 전제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한 동기가 무넛인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318쪽)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 있다. 예수가 당대의 가부장적 전제들 중 몇몇에 도전한 것은 사실이다. 또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예수의 그러한 점을 계승해 여성 지도자 몇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 세계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여성들의 실제 삶과 형이상적 신학 모두에는 여전한 억압과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성의 표현과 이미지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그려 내는 것은 결국 독자의 해석이다. (446쪽)

믿는 이들이 수천 년 동안 성서를 공부해 왔지만 그럼에도 성서의 지위는 여전하다는 사실에 위로받기 바란다.....실제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사용할 때는, 사람들의 개인 경험, 가족력, 문화적 배경, 신앙의 전통이 지식을 다루는 방법을 형성한다. 성서의 항구성이 증언해 주듯, 성서는 끝없이 변화하는 우리 환경 속에서 새로운 반복과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독자와 내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후에도 사람들은 성서를 생각할 때 도움이 되는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해석을 계속 할 것이라는 점이다.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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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이 책읽기의 즐거움만 한 것을 글쓰기에서 한번도 느낀 적이 없다는 고백에 의거하여, 그가 분명 읽은 책에서 추려 낸 서문들을 따라 가 본다. 나 또한 책을 구입할 때 서문과 목차가 중요한 한 몫을 차지하기에, 따로 모아 논 서문을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저자들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읍소하는 내용도 있지만 자신이 쓴 글이 독자들에게 오독과 오해를 방지하고,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몸과 맘을 다하여 노력한 흔적들이 묻어 나온다. 본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았을까, 그 애씀이 마음을 두드리는 울부짖음같다.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느새 4월로 성큼 들어왔고, 한달넘게 이어져온 갈등은 막을 내렸다. 새로운 일터에 처음 온 사람이 이견을 제시한 것 자체가 생소하고 항명 그 자체이고, 그러면 안되는 일을 맞 받아치고, 주어진 대로 해야 하는데 감히 어기려고 하는 내가 그들에게도 무척 낯선 경험이지 않았을까... 이또한 힘의 싸움일까... 승리를 맛보지만 씁쓸하다. 갈등자체를 힘들어 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윽박과 강요가 난무하다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더 이상 잃을거도 없고 아닌 것을 아니라 하는데 뭘 더 말하리요,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나 또한 서문을 열었으니, 그들에게 비친 나의 모습은 이러하고, 이렇게 일을 하리라는 큰 도장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첫 인상, 첫 단추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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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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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6쪽)

서문을 되새김질해서 얻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서문과 본문 사이에 생긴 모슨(틈) 혹은 미해결을 감지하는 것이다. 서문과 본문 사이에 이런 모순과 미해결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문은 크고 본문은 작기 때문이다. 이런 전도는 서문과 본문의 중요성이 양적 문제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13쪽)

참으로 괴이한 것은,
그리 좋다는 책을 읽고서도 개과천선은커녕
되레 성서와 교훈서를 깔보니, (27쪽)

"격언이란 시중에 널리 쓰이는 말이며, 어떤 사태와 시기에 들어맞는 말로서, 글자 그대로의 말과는 다른 속뜻을 가지고 있다." (36쪽)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이성을 경시한 결과 미신을 신의 신탁으로 여기게 되었고, 두려움 때문에 광기에 내몰려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자연법칙에 대한 무지가 공포스러운 신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권력은 그 잘못된 믿음과 미신을 이용해 대중을 통치한다고 본 것이다. (85쪽)

그렇기 때문에 미신을 발생시키고, 유지하고, 조장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88쪽)

우리가 부분을 관찰하는 것은 오직 전체를 함께 판단하기 위해서다. 또 모든 원인을 검토하는 것은 모든 결과를 알기 위해서다. (113쪽)

복잡한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우리 스스로가 자연적 조건으로 인해 엄격한 규칙과 좁은 테두리 속에 갇혀 있으므로-그 문제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을 구별해 하나씩 자세히 조사해보아야 하며 모든 것을 아주 단순화시켜 고찰해야 한다. 원리들이 미치는 영향에 따라 이 복잡한 문제를 고찰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미치는 영향에 비추어 다시 원리들을 고찰해야 한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를 그와 유사한 것들과, 심지어는 그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것들과도 비교해보아야 한다. (142쪽)

하지만 인간적 정의, 다시 말해 정치적 정의는 인간의 행위와 가변적인 사회조건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어서, 문제의 행위가 그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가 혹은 유용한가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152쪽)

여성이 이렇게 아름답지만 무익한 존재로 전략한 것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이런 교육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은 우리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암컷으로 보고, 현모양처보다는 매력적인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 남성학자들의 저술들이었다. (157쪽)

남자든 여자든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므로, 모든 것이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61쪽)

반성 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고민이나 배신당한 영혼의 비통한 놀라움이나 완전한 신뢰 뒤에 이어지는 의심, 어떤 한 사람을 의심한 결과가 세간 전체로가지 퍼져가고 스스로 짓밟은 존경을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보고서야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신성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함께 느끼지 않고 상대한테만 느끼게 했다고 믿는 그 애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깨다는 것이다. (207-208쪽)

연구와 관찰, 철학과 경험은 결코 상대를 경멸해서도 안 되고 배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상대를 상호 보증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213쪽)

나는 종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한 종에서 만들어졌다고 인정되는 변종이 그 종의 자손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같은 속에 속하는 종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소멸해버린 종으로부터 얻어진 자손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나는 자연 도태가 변화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도 확신하는 바이다. (251쪽)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의 내용들 때문인데, 모든 역사적 발전은 이 내용들의 가치를 이미 전제한다.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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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번역을 참 잘했다. 역자가 직접 쓴 글같다. 성서를 '역사적 방법론, 네러티브 이론, 문학 비평 방법론, 정경사 방법론, 해석사, 영향사'로 읽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성서를 기록한 저자의 심정도 시대적 배경으로 들어가 보게 된다. 생각지 못했던 방법이다. 그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부언되고 첨삭되었다는 사실까지, 성경읽기가 훨씬 편해졌다. 문자의 문턱을 넘지 못했는데 마음 속에 쓱 들어오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통과한 성서가 지금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저자가 이야기 단계-역사 단계-영적 단계로 나아가면서 성서를 이해한 방법에서, 본문으로 하여금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바를 말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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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하버드 석학 하비 콕스의 바이블 가이드
하비 콕스 지음, 김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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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습득하던 새 지식이 대단히 흥미로운 때도 많앗지만,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이렇게 ‘역사 비평적‘으로 해부하는 것이 성서가 내게 가지게 된 개인적 중요성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혹은 과연 화해가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그 시간은 편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 그 시간을 통해 이 같은 힘든 과정을 경험하는 이들을 내가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목적은 그런 이들을 도와 이 과정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6쪽)

성서는 초청이고, 우리가 참여할 여지가 있는, 결말이 열려 있는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성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20쪽)

성서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 우리의 문화, 또 좋든 싫든 우리 각각의 혼을 가르치는 책이다. 성서는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에 박혀 있어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몸속에 지니고 다닌다. 펴보기도 전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펼 때는, 거기서 보게 되는 것과 정말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것이다. (26쪽)

개신교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원죄‘의 근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죄란, 우리 자신-국가로서든 개인으로서든-이 보기에 옳거나 선한 것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옳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다. 독일 신학자 틸리히는 거기에 좀 더 철학적인 의미를 더하여 원죄가 ‘소외‘의 뜻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소외란 우리가 우리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유한한 존재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51쪽)

그 시대가 ‘기적의 시대‘는 아니었겠으나, 그 시대 사람들이 기적을 믿었다는 것, 또 세상을 우리의 렌즈가 아닌 그들 나름의 렌즈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출애굽기의 ‘기적들‘이 뜻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때문이엇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 나름의 언어로 말했다. 성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성서학도는 그 세계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이 세계관을 미신이라고 생각해서 거부해버리지도 않고-종종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현대 과학으로 합리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76쪽)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 흠 있는 역사책이 아니라 어쩌면 훨씬 더 의미 있는 다른 무언가로 읽을 수 있을까? 여행자 중 한 사람이 멋진 답을 내놓았다. 그는 이제 우리가 출애굽기를 두어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기원전 13세기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실제 민족이 실제 상황(7세기) 속에서 먼 과거의 실과 천 조각 들을 모아 자신들을 위한-그리고 온 역사를 위한-인간 해방의 증언으로 짜낸 과정을 또한 말해준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이 과정에 대한 감동적인 증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책이 수많은 세대들에 끼친 위대한 영향에 관해서도 계속 생각해볼 수 있다. (102쪽)

출애굽기를 읽고 지금 또 여호수아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거에서 모아들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되찾아져서 오늘의 문제를 위해 사용되는지 그 과정을 발견하게된다. 실제로 이것은 수많은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이다. (110쪽)

욥기를 주의 깊게 읽고 생각한 후에도, 또 그 모든 신랄한 시와 대담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님은 욥의 구도적인 질문들에 답하지 않으신다. 욥의 위로자들도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것이 답일지 모른다. 무고한 자의 고통에서 어떤 만족스러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궁극적으로는, 아마 헛수고일 것이다. (144쪽)

미첼은 말하길,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욥의 비굴한 굴복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이다. ‘티끌‘을 언급한 것도 자기 비하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비난과 상관없다. 그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욥이 후회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침묵이 더 적절한 응답이었어야 할 상황에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한 존재에 관해서 말하려 한 것이다. (155쪽)

예언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잊혀진 이들과 목소리 잃은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중에게 상기시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8쪽)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언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참으로, 우리는 예언자들을 왜 읽어야 할까? 우리가 예언자들을 읽는 이유는 이렇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등장했더라도 그들의 말이 그들의 시대에만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우리 세계를 왜곡하는 거대한 불평등과 불필요한 고통이라는 역겨운 불의를 고스란히 맞닥뜨리게끔 한다. 먼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말하지만, 그들의 말은 오늘 아침 신문 머리기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다. (186쪽)

우리처럼 그들(복음서 저자들)도 예수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앗다. 그들은 예수를 알던 사람들이나 예수에 관해 들은 사람들에게서 예수에 대해 배워서 예수가 말한 이야기들과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한 것이다. (197쪽)

각 복음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특정 청중을 염두에 두고 썼는데, 이 독자층은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과 종교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중심이 예수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지만, 예수의 의의에 대해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지녔다. 또한, 그들 모두는 다양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한 서로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질적인 그룹들에게 말하려고 자신들의 복음서를 빚을 때, 예수의 의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전달하고 각 그룹의 사고방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해 고민했다. (230-231쪽)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서를 읽을 때 기억하면 좋은 것이 있다. 바울이 그것들을 쓸 때(기원후 53-62년) 복음서들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바울의 편지들을 읽을 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이 잇다. 이 편지들의 모든 수신자들은 예외 없이 로마 통치하에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이 정력적으로 반포한-그리고 필요한 경우 강제력을 동원하여 부과한-정치. 종교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편지 수신자들 양쪽 모두 이 상황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제국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로마는 단지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의 장이었다. 또한 사울은 유대인이었다. (248쪽)

바울의 편지들을 읽을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바울이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의 관습과 윤리를 많이 공유했고 어쩌면 당시의 편견 중 일부도 공유했다. (261쪽)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 들어 있는 바울 자신이 한 말과 누가의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에 관한 이야기 모두를 2000년이 지난 오늘 읽을 때에, 바울과 누가가 모두 상상하지 못한 어떤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두 사람 다 쓴 적이 없는 말이다)는 유대교(이 말도 당시에 쓰이지 않았다)내의 개혁적 분파로서 영아기 단계에서 그다음의 지극히 중요한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 혼자 그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한 유대인 바울은 그 이후 서양 역사 2000년-이 기간 동안 그가 가르친 신앙은 지구를 빙 돌았다-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로마 세계에다 예수의 메시지와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해석해주는 위험한 일을 맡아 한 것이다......그의 과업-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이방) 민족들을 어떻게 아우를 것인가-을 염두에 둘 뿐 아니라 바울의 세계로부터 광대하게 팽창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맞게 되는 도전을 또한 기억하면서 그를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아테네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았다. 그것은 위험과 함정이 가득한 임무였다. (272-273쪽)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칼은 요한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요한은 그 관점을 지닌 채 계시록을 쓰고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런 상황과 상관없지만, 지구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계시록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에 관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다. (313쪽)

즉,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뚯하는지를 파악하려면, 이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동일한 드라마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내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가?......오늘날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에 성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삶의 상황이 우리와 다른 이들, 우리가 ‘다른 이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시각과 견줘 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322쪽)

무엇보다도 성서는 우리가 인류라는 종으로서 저질러온 끔찍한 폭력에 대한 가감 없는 증언이다. 동시에 성서는, 우리를 둘러싼, 그리고 불러 낸 적 없는데도 우리 속에서부터 분출해 나오는, 신비를 직면하려는 인류의 시도들을 기록해놓은 문서이기도 하다......성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유가 또 있다. 성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라고 권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돕도, 모든 종교 전통의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나뉠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쳐준다.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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