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람들이 믿는 바(또는 안 믿는 바)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전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하여 성서를 더 잘 이해하고 성서를 교양 있게 대하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또 성서에서 온 표현이다 개념을 더 잘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돕고, 왜 사람들이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쉽게 흥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12쪽)
오늘날의 성서를 이루는 내용 중 대부분은 책이란 것이 존재하기 이전, 즉 사람들 대다수가 글을 읽을 줄 알기 이전부터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성서 이전의 본문들은 대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문서들이었는데, 많은 경우는 옛 구두 전승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이런 성서 이전의 본문들이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소수 엘리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쓰이고 편집.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21쪽)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이 바울이 기원후 50년경에 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데살로니가전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20년 뒤인 기원후 70년경에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 사후 한 세대(40년)를 채운 뒤의 일이었다. (51쪽)
안타깝게도 성서가 말해 주는 역사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문을 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72-73쪽)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사용했던 히브리 성서는 ‘히브리어‘도 아니었고 ‘성서‘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직 고정되지 않은, 경전의 지위를 얻지 못한, 히브리어 두루마리들의 그리스어 번역을 그들의 성서로 사용하였다. 또 하나는 예수를 처음 따르는 이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 모두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그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102쪽)
예수의 특별한 본성에 대한 믿음, 즉 예수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든 분이라는 그 믿음이 신약의 저자들로 하여금 붓을 들게 했다. 그들은 예수의 일대기(복음서들)을 쓰고, 교회의 역사(사도행전)를 쓰고, 구너고, 교훈, 격려의 편지(그 외의 책들)를 썼다. (267쪽)
사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해 말하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특별한 본성, 즉 신인 동시에 인간인 근원적 독특성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밝히는 데에 힘을 집중하였다.....그가 전한 것은 부활한 메시야,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수의 특정한 행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 말이다. (277-278쪽)
성서는 가부장적 문화와 사고방식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렇기 대문에 성서 본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영향 아래 있던 저자들이 전제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한 동기가 무넛인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318쪽)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 있다. 예수가 당대의 가부장적 전제들 중 몇몇에 도전한 것은 사실이다. 또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예수의 그러한 점을 계승해 여성 지도자 몇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 세계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여성들의 실제 삶과 형이상적 신학 모두에는 여전한 억압과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성의 표현과 이미지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그려 내는 것은 결국 독자의 해석이다. (446쪽)
믿는 이들이 수천 년 동안 성서를 공부해 왔지만 그럼에도 성서의 지위는 여전하다는 사실에 위로받기 바란다.....실제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사용할 때는, 사람들의 개인 경험, 가족력, 문화적 배경, 신앙의 전통이 지식을 다루는 방법을 형성한다. 성서의 항구성이 증언해 주듯, 성서는 끝없이 변화하는 우리 환경 속에서 새로운 반복과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독자와 내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후에도 사람들은 성서를 생각할 때 도움이 되는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해석을 계속 할 것이라는 점이다.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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