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를 읽었다. 죽음을 앞두고 장조와 단조의 음계를 하나씩 짚어 가면서 써내려간 악보다.

자신의 삶이지만, 그 과정은 오롯이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이라 한다.

자신에게 몰입할수록 점점 약해지지만, 타자를 지키려할 때는 나날이 확실해지는 시간이라 한다.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누군가의 죽음은 또 다른 나를 죽이는 일과 같다. 

나는 아주 많이 느리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에 대해, 한참 후에야 제대로 인식하고 느낀다. 

그래서 주변인들이 특이하고, 생뚱맞는 반응에 놀라기도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한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고, 의식하지 않으려고,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고,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자꾸만 떠오른다. 

맹자 공부하는 학우 중에 스스로 먼저 가 버린 자식을 가진 이가 있다.

특히 이 맘때가 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사는 게 아니라는, 그 분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241쪽,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273쪽에서 마지막 279쪽, 

건너가기, 넘어가기, 부드럽게 여유 있게 /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 겸손의 마음, 아름다움의 마음 / 무엇이 문제인가 / 가고 오고 또 가고 / 잘 보살피기 / 적요한 상태 / 내 마음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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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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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설과 사진, 음악 등 여러 영역의 미적 현상들을 다양한 이론의 도움을 빌려 읽으면서 자본주의 문화와 삶이 갇혀 있는 신화성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일에 오랜 지적 관심을 두었다. 시민적 비판정신의 부재가 이 시대의 모든 부당한 권력들을 횡행케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믿으며.. (표지 안, 저자소개)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24쪽)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 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51쪽)

세상의 일상은 무사하다. 그 무사함 안에 팩트들이 들어 있다. 팩트는 엄혹한 칼이다. 정확하고 용서가 없다. 이 칼의 무심함에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 기록은 사랑이다. 사랑은 희망이다. (중략)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맞았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60쪽)

긴 세월 타지에서 성실한 삶을 배운 뒤에 어느 날 문득 그곳이 타향임을 발견하고 고향을 기억하는 마음 같다고 할까. (중략) 한 생을 세상에서 산다는 건 타향을 고향처럼 사는 일인지 모른다. (62-63쪽)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많은 것이 그대로다 어디에 발을 딛고 설 것인가. 답은 자명하건만 그 자명함 앞에서 매일을 서성인다. 서성임, 그건 자기연민일 뿐이다. (115쪽)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145쪽)

나는 말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166쪽)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건 나의 죽음이 누군가를 죽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187쪽)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194쪽)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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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 가는데, 일어나서는 안 될 이런 재앙이 일어나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 


이 번에 읽은 글은 제주도에서 알게 된 장정일과 한영인이 주고 받은 문학 관련 편지 글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시각으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 곁들여 세상사와 서로의 기호품과 일상까지, 결론은 차이가 나는 서로를 인정하고 합의와 존중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일한 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삶을 다르게 하고, 천양지차의 결론에 다다른다. 말의 맥락보다는 표면을 보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은 아니고... 하지만, 개개인의 판단이 중요하고 판을 치는데, 본인들이 한 말이나 글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나의 잘못을 세상의 잘못으로 치환하지 않기, 후안무치, 자립 등등의 단어가 남아있다.


동생들과 가을 단풍을 즐기자고 만나서, 가까운 사이에서는 말하면 안되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정의당을 찍었다는, 그건 사표라는, 최악과 차악의 후보자 등, 진보와 보수, 교회와 목사, 종교생활, 교회출석, 헌금 등까지 밤을 새웠다. 각자의 생각에서 그게 아니고, 틀리고가 아니다로 서로 인정만 하면 된다. 그 중 소주 몇 병을 더 마신 이도 있고, 누구는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불을 토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헤어졌다.   


나는 분명히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거지, 점검해 본다. 기준점도 없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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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 문학과 삶에 대한 열두 번의 대화
장정일.한영인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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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인데, 막상 정치라는 게임(노름판)에서는 주인이 아닌 겁니다. (중략) 투표를 독려하는 말 가운데, 선거는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말도 있더군요. 최악과 차악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의미죠. 그런데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다시 읽으며 참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차이란 같은 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13쪽) 이런 명제가 나오게 된 책의 전체 맥락을 깊이 살펴야겠지만, 저 명제는 어디서든 써먹는 게 가능한 ‘스위스 칼‘ 같은 명구군요. ‘차이‘가 중요한 정치적 동기이자 자원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생각하면 반시대적이기까지 합니다. (51-52쪽, 장정일)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한영인)

문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는 것‘에 대한 ‘믿는 것‘의 우위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문학을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학 대신 옛 신문과 잡지, 영화, 드라마 등을 들여다봅니다. (중략) 문학에 대한 ‘앎‘이 문학에 대한 ‘믿음‘을 초과하게 되는 순간 문학의 죽음은 시작되는 것이겠습니다. (137쪽, 한영인)

조국 사태의 핵심은 조국이라는 고유명일 수 없죠. 그런데도 계급 사이의 불공정은 물론, 교육이 계급을 재생산한다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조국 사태‘는 조국 부부의 인격과 그들이 법정에서 받게 될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로 축소되었습니다. (중략)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학창시절 준비할 수 있는 ‘스펙‘이 차이가 나고, (중략) 그가 드러낸 사태의 본질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난생처음 받는 공포스러운 질문이 있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 어느 족을 선택해도 뒤끝이 좋지 않으리란 것을 아이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런데도 기어코 한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 아이가 처한 조건 또는 우둔함이죠.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나는 피자가 좋아!" 우물가에서 당장 숭늉을 마실 수 없듯이, 피자를 먹으려면 화덕부터 만들어야죠. 화덕을 만드는 게 진보죠. (157쪽, 장정일)

위악적인 사람은 거짓의 휘장을 벗고 가장 취약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지만 위선적인 사람은 오직 남에 의해 까발려질 때만 자신의 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처럼 위선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립적으로 관계할 수 없기에 도덕적 능력 또한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172쪽, 한영인)

눈에 보이는 오보로 인한 피해보다 ‘아무 생각 없음‘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가 더 막대한데 언론중재법으로는 그와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레거시 미디어가 자신들이 쓴 기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을 가지지 않듯 트위터리언들도 자신이 과거에 했던 트윗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서이제의 작품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혐오를 세상에 대한 혐오로 치환하며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말만 내뱉을 뿐,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해본 적 없는 인간들"(44-45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지만 이런 부류들에 대한 아주 정확하고 인상적인 소묘라고 생각합니다. (225-226쪽, 한영인)

‘뻘짓‘은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지젝의 용어로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행위로의 이행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 혹은 주체의 무기력을 감추기 위한 과잉 행동을 가리키죠. (중략) 그런데 전후 한국소설의 기본 바탕이 모두 이랬습니다. 거의 모든 작가가 행위로의 이행을 일삼습니다. 대표적인 작가가 손창섭이죠. 못나기 짝이 없는 가족과 친구들끼리 서로를 조롱.학대하고 시기.질투합니다. 적을 똑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임현의 "멜랑콜리적 죄의식" 역시 행위로의 이행으로 볼 여지는 없을까요. 한국의 근대 문학은 전후는 물론 4.19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을 억압하는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적과 정면 대결하기를 회피했습니다. (중략) 적을 놓치고 적을 외면하면 할수록 증상으로서의 죄의식은 깊어지지요. (276-291쪽, 장정일)

제가 써왔던 비평이나 에세이에 거짓이나 허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진실을 말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죠. (중략) 거짓되진 않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는 이야기. 그에 비하면 소설은 허구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거짓을 초과하는 진심이 들끓곤 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은 마땅히 분석과 비평을 필요로 하는 것이겠죠. (420쪽, 한영인)

저는 한국어로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한국문학의 내부자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중략) 제가 한국문학을 읽는 것은 업계에 있어서라는 말이죠. 바로 이렇기 때문에 업계에 포획된 사람, 형 같은 평론가에게 절실한 것이 내부를 대타화할 수 있는 능력이고 거리 두기죠. 형 말처럼, 요즘 세상에 "거짓되진 않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는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이 지점에서부터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446쪽,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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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본인의 이야기, '단순한 열정'을 읽다. 밝힐 수 없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과정에서의 심리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다. 동사의 변화를 통하여 현재의 바램과 소멸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닳아지고, 기억은 사라지고, 몸은 늙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오래 전에 '사랑하는 동안'의 기억들을 모아모아 보려 애썼다. 유물처럼 주고 받은 수 백통의 편지와 전화 카드가 흔적으로 어딘가에 남겨 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너와 연관되지 않은 게 없었는데, 모든 것들이 너를 제하고는 의미가 없었는데, 그러한 기억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사랑도 사라졌다. 너무 오래되었다. '쿵쿵'은 의미 다른 '쿵'으로, 이제는 전우애로 다져진 남사친, 여사친 정도로 살고 있는 우리다. 


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동사보다는, 행여, 여전히, 아직도, 하마나, 지제나저제나, 벌써, 아주, 매우, 등등의 수많은 부사들이 그리운 마음에 쌓이고 쌓일 때,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반복하여 읽은 게 떠오른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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