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 문학과 삶에 대한 열두 번의 대화
장정일.한영인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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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인데, 막상 정치라는 게임(노름판)에서는 주인이 아닌 겁니다. (중략) 투표를 독려하는 말 가운데, 선거는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말도 있더군요. 최악과 차악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의미죠. 그런데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다시 읽으며 참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차이란 같은 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13쪽) 이런 명제가 나오게 된 책의 전체 맥락을 깊이 살펴야겠지만, 저 명제는 어디서든 써먹는 게 가능한 ‘스위스 칼‘ 같은 명구군요. ‘차이‘가 중요한 정치적 동기이자 자원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생각하면 반시대적이기까지 합니다. (51-52쪽, 장정일)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한영인)

문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는 것‘에 대한 ‘믿는 것‘의 우위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문학을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학 대신 옛 신문과 잡지, 영화, 드라마 등을 들여다봅니다. (중략) 문학에 대한 ‘앎‘이 문학에 대한 ‘믿음‘을 초과하게 되는 순간 문학의 죽음은 시작되는 것이겠습니다. (137쪽, 한영인)

조국 사태의 핵심은 조국이라는 고유명일 수 없죠. 그런데도 계급 사이의 불공정은 물론, 교육이 계급을 재생산한다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조국 사태‘는 조국 부부의 인격과 그들이 법정에서 받게 될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로 축소되었습니다. (중략)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학창시절 준비할 수 있는 ‘스펙‘이 차이가 나고, (중략) 그가 드러낸 사태의 본질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난생처음 받는 공포스러운 질문이 있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 어느 족을 선택해도 뒤끝이 좋지 않으리란 것을 아이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런데도 기어코 한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 아이가 처한 조건 또는 우둔함이죠.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나는 피자가 좋아!" 우물가에서 당장 숭늉을 마실 수 없듯이, 피자를 먹으려면 화덕부터 만들어야죠. 화덕을 만드는 게 진보죠. (157쪽, 장정일)

위악적인 사람은 거짓의 휘장을 벗고 가장 취약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지만 위선적인 사람은 오직 남에 의해 까발려질 때만 자신의 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처럼 위선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립적으로 관계할 수 없기에 도덕적 능력 또한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172쪽, 한영인)

눈에 보이는 오보로 인한 피해보다 ‘아무 생각 없음‘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가 더 막대한데 언론중재법으로는 그와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레거시 미디어가 자신들이 쓴 기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을 가지지 않듯 트위터리언들도 자신이 과거에 했던 트윗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서이제의 작품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혐오를 세상에 대한 혐오로 치환하며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말만 내뱉을 뿐,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해본 적 없는 인간들"(44-45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지만 이런 부류들에 대한 아주 정확하고 인상적인 소묘라고 생각합니다. (225-226쪽, 한영인)

‘뻘짓‘은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지젝의 용어로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행위로의 이행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 혹은 주체의 무기력을 감추기 위한 과잉 행동을 가리키죠. (중략) 그런데 전후 한국소설의 기본 바탕이 모두 이랬습니다. 거의 모든 작가가 행위로의 이행을 일삼습니다. 대표적인 작가가 손창섭이죠. 못나기 짝이 없는 가족과 친구들끼리 서로를 조롱.학대하고 시기.질투합니다. 적을 똑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임현의 "멜랑콜리적 죄의식" 역시 행위로의 이행으로 볼 여지는 없을까요. 한국의 근대 문학은 전후는 물론 4.19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을 억압하는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적과 정면 대결하기를 회피했습니다. (중략) 적을 놓치고 적을 외면하면 할수록 증상으로서의 죄의식은 깊어지지요. (276-291쪽, 장정일)

제가 써왔던 비평이나 에세이에 거짓이나 허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진실을 말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죠. (중략) 거짓되진 않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는 이야기. 그에 비하면 소설은 허구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거짓을 초과하는 진심이 들끓곤 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은 마땅히 분석과 비평을 필요로 하는 것이겠죠. (420쪽, 한영인)

저는 한국어로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한국문학의 내부자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중략) 제가 한국문학을 읽는 것은 업계에 있어서라는 말이죠. 바로 이렇기 때문에 업계에 포획된 사람, 형 같은 평론가에게 절실한 것이 내부를 대타화할 수 있는 능력이고 거리 두기죠. 형 말처럼, 요즘 세상에 "거짓되진 않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는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이 지점에서부터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446쪽,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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