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여행자 2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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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매커니즘을 의미한다면 도쿄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섬세하게 튜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도쿄에선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고 주의 깊게 조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모든 사물이 마치 행성들이 제 궤도를 따라 공전하듯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96쪽/219쪽)

도시에 대한 무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가진 특권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로는 나는 어느 도시에 가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다 신뢰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앎에 ‘갇혀‘ 있다. 이런 깨달음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갇힌 앎을 버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154쪽/236쪽)

도쿄의 번화가들은 기묘하다. 마치 볼륨을 줄인 대형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대단히 화려하지만 조용하다. 어떤 억제된 에너지가 착 가라않아 있는 듯한 도쿄의 거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개인의 존재이다. 도쿄는 근대 이래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문제적 개인들은 포용해온 유일한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 범죄자, 펑크족,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마약중독자들이 도쿄에서 드디어 살 곳을 찾았다. 천황 암살의 뜻을 품고 잠입한 이봉창도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임무 시작 전까지 유유히 지낼 수 있었다. (208쪽)

일본인에게는 조화와 적절한 거리, 주어진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의 문화적 표현이 하이쿠 아닐까? 규칙을 지키면서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의 감수성을 담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이쿠 미학의 요체이다. 튜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일본이의 정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게 하이쿠라면, 하이쿠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도쿄의 호텔이다. 도쿄의 호텔들은 대체로 좁다. 그렇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호텔이 호텔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상태를 갖도록 만드는 장인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234쪽)

도쿄에서 절과 신사, 미술관과 백화점만 보고 돌아가는 사람은 불운하다. 도쿄에서는 적어도 하루를 들여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작고 아담한 가게들을 순례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그것은 도쿄가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취향과 고집을 가진 인간들이 친절하기까지를 기대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오직 도쿄만이 그 예외이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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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한 밥상 - 박완서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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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26쪽, 부처님 근처)

지금까지 한두 사람의 노파 이야기는 어느 친구한테 들은 실제로 있었던 노파들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노파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도 굳이 이 두 노파를 한자리에 모시고 싶었음은 내가 발견한 노파들의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렬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여자라는 것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노파라고는, 할머니라고는 못 하겠다. 여자라고밖에는. (92쪽,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나는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당면한 엄청난 고통 중 털끝만한 부피도 덜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부당해서 곧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남남끼리요. 사람도 결국은 외톨이라는 걸 받아들이기엔 그 아이는 너무 작고 어렸다. (167쪽, 엄마의 말뚝2)

내 모가지에 마늘 열 접이면 고작인 것을 감히 아파트 한 채를 이고 가려 했으니,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죄를 받는다니까. 그렇지만 아파트 한 채는 지 알고, 내 알고, 하늘까지 아는 일이건만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넘길 수가 있담. 천벌을 받을 년. (290쪽,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하다 못해 스킨십조차 없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스킨십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의 정장이가 그렇게 꼴 보기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을 비비는 행동이 끊긴 것과 그의 몸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던 것이 무관하지 않다면 몸을 비비는 행동이란 그닥 얕볼 일도 아니다 싶었다. 그녀가 오늘 느낀 것은 결코 구체적 욕망이 아니었다.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가망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렇게도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359쪽, 너무도 쓸쓸한 당신)

"(중략) 누군가가 세금을 내니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애걔걔, 그까짓 쥐꼬리만한 혜택.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들이 털도 안 뜯고 삼켜버리거나 즈이들끼리 왕창 인심쓰는 데 유용하는 액수에대 대면 그까짓 거 조금도 고마워할 거 없다, 너." "쥐락펴락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한던 인간도 죽으면 이 세상의 있는 것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거 하나라도 확실하면 됐지 뭘 더 바라." (394쪽, 대범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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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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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물었다.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맹자께서)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면서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남에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며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나무가지를 꺾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43쪽)

(공손추가 물었다)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편벽된 언사에서 그 가려짐을 알고, 과장된 언사에서 그 빠져 버림을 알며, 사특한 언사에서 그 벗어남을 알고, 회피하는 언사에서 그 궁색함을 안다. (이런 언사들이) 그 마음에 생기면 그 정치를 해칠 것이고, 그 정치에 드러나면 국가의 사업들을 해칠 것이다.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반드시 나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105쪽)

백성들이 살아가는 도리는 일정한 생업이 있으면 사람은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일정한 생업이 없는 사람은 변함없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 만약 변함없는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간사하고 사치한 행동을 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른 후에 (그 죄에) 따라서 처벌한다면, 그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공손하고 검소(검약)하며 신하들을 예로써 대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데에는 일정한 법제가 있습니다. (169쪽)

군주가 되고자 한다면 군주의 도리를 다해야 하고, 신하가 되고자 한다면 신하의 도리를 다해야 하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을 뿐이다. 순이 요임금을 섬기던 방법으로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주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던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성ㅇ르 해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어진 정치를 하느냐 어진 정치를 하지 않느냐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239쪽)

맹자께서 제 선왕에게 말씀하셨다. "군주가 신하 보기를 자기의 손발과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자기의 심장이나 배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군주가 신하 보기를 개와 말처럼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길 가는 사람들과 같이 여기며, 군주가 신하 보기를 흙이나 지푸라기와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원수와 같이 될 것입니다." (275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이 불인을 이기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기는 것과 같다. 오늘날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물 한 잔으로 마차 가득한 나무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아서, 불이 꺼지지 않자 물이 불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또한 심하게 불인을 조장하는 것이어서, 마침내는 반드시 인을 없애 버릴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오곡은 종자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여물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 인 역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르익게 해야 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399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사의 이치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서 진실하다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힘껏 서를 실천하면 인을 추구함에 이보다 더 가까운 길은 없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숙달되어 있으면서도 그 까닮을 깊이 알지 못하며, 일생동안 그것을 따르면서도 그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 보통 사람들이다." (435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을 확충하여 차마 할 수 있는 바에까지 도달하면 그것이 바로 인이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일은) 기꺼이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확충하여 기꺼이 하고자 하는 바에까지 도달하면 의이다. 사람이 남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인은 이루 다 사용할 수 없고, 사람이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의는 다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이 남으로부터 ‘너, 너.‘ 하고 업신여기는 호칭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어디를 가든 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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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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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몸과 마음은 터무니없이 격렬해서, 마치 과속하는 자동차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도 치명적인 접촉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그런 접촉 사고들로 그녀의 마음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더 다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상처 입었었다. 삶이 자신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철썩철썩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아픈 촉각보다 힘겨웠던 것은 제 귀로 들어야 했던 그 명백한 고통의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25쪽)

40년이라는 것, 1억 5,600만 년에 비하면 먼지 같은 세월이야, 하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은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들을 만나기에 정말 좋은 장소이기는 할 것 같았다. 또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를 만나야 하는 걸까, 이 만남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걸 묻고 그가 대답할까? 그렇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61쪽)

가난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선택이던 것이 필수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품질이 많이 좋고 가격이 약간 비싼 것보다 품질이 많이 떨어져도 값이 약간 싼 물건들을 고르는 것, 돈이 생기는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116쪽)

돌아보면 시간은 언제나 두껍게 얼어버린 빙하 같았다. 좀처럼 쪼개지지 않아 틈을 낼 수 없었으나 돌아보면 한 세기처럼 거대한 단위로 훌쩍 흘러갔다. 어린 그녀들은 이제 중년을 훌쩍 넘었고 그 시간의 긴 바다를 건너 맨해튼 한복판에서 만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198-199쪽)

그런데 안개를 뚫고 떠오르는 것은 그때 썼던 편지의 구절이 아니라 편지를 쓰던 자신이었다. 배가 고팠던 밤. 바람이 거셌던 길고 긴 서베를린의 밤들. 결국 추억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세를 반추하는 것일까. (208쪽)

육체는 40년이 지나도 그 기억을 지우지 않았고 마치 모든 것이 폐허로 돌아간 듯한 이 지하의 공간에서 그 기억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229쪽)

"많이도 미워하고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살고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날씨가 춥죠? 하고 인사하고...... 살아보니 이 두마디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 싶다. 살아보니 이게 다인 것 같아, 미호야." (251쪽)

작년에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 갔을 때 버질의 시를 봤지요.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노데이, 쉘, 이라고 그가 영어 구절을 외울 때, shall, 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린 시절 영어시간에 배웠던 단어, 그건 운명 혹은 숙명 저 미래를 내포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256-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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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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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한세진과 대화하면 자주 이렇게 되었다. 언짢고 불편해졌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말들 때문에. (62쪽)

한영진이 한세진의 운동화를 종종 신고 나갔다. 한세진은 언니가 그렇게 해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남은 걸 신었고, 자기걸 건드리지 말라고 나중에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을. 한영진은 최근에 그걸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 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63쪽)

그런데 엄마, 한민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한영진은 오래 전에 그 말을 들었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이순일도 그랬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살아보니 정말이지 그게 진리였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81-82쪽)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다투거나 하면 즉시 개입할 수 있었는데, 한쪽을 혼내거나 둘 다 혼내거나 달래거나 중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릴 때만큼 자주 다투지는 않았지만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두고 다투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109쪽)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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