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페이지는 빛이 깃들어 있다. 그 주변으로 울타리를 지어 그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데이비드 마킥스의 <느리게 읽기>를 답답한 마음에 몇 년 만에 다시 폈다. 몇 년 간 리뷰없이 책을 읽을 때는 그저 피난처로서 무어라도 읽어내면서 온전하게 쉴 곳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2017년을 마무리하면서 모든 SNS 계정을 삭제하고 나를 얽매는 디지털 세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자 생각했다. 리뷰를 쓰면서 140자에 길들여진 나의 글쓰기를 변화시켜 보자는 것은 덤으로 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블로그도 다시 시작하고, 다시 책 리뷰를 한 편씩 올리게 되었는데 뚜렷한 목표없이 읽고 올리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계속 나를 짓눌렀다. 짓눌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정리하기에 힘들었던 책의 리뷰를 쓴 날에는 꿈에서조차 내 안에서 정리되지 못한 페이지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어 괴롭혔고, 내가 온전히 이해한 페이지가 나타나 곤히 재웠을 정도니. 내가 읽은 책들은 겉핥기에 불과했다는 좌괴감, 나는 그 책들에게 있어 "잠재적인 거주자"가 아니라 단지 "관광객"이었다는 생각이 나를 계속 힘들게 했다. 아니 지금도 힘들게 한다. 정미경 작가의 <당신의 아주 먼 섬>과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벌써 다 읽고 <새벽까지 희미하게>는 두번이나 읽었음에도 주인공들이 계속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더 할 얘기가 있지 않느냐고, 왜 그렇게 급하게 자기들을 버려두고 갔느냐고 내 마음을 휘젓는다. 정희진 선생님의 <혼자서 본 영화>는 또 어떻고.
내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라며 우두커니 서 있다. 열심히 뛰다가 갑자기 멈춰섰다는 말이다. 내가 왜 뛰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누가 나를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빨리 읽고 빨리 리뷰를 쓰려다 멈춰 선 이 순간이, 온전한 독서와 글쓰기를 하기 위한 과정이자 진통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책과 온전히 사귀어 너와 내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책을 사들이는 오랜 습관에 책장에도 꽂히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책들을 정리했다. 집에 있는 책부터 한 권씩 읽어 내리라. 한 권씩, 친구를 사귀듯 읽어가리라. 급하게 쓱 한번 읽고 내가 너를 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관광객이 아니라 잠재적 거주자로서 책과 함께 하고 그 책이 내게 주고 싶어하는 것을 잘 소화하고 싶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쓰고나니 답답했던 것이 좀 풀린다. 달리기 말고, 한 걸음 독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는 독서를 해야겠다. 울타리도 짓고, 오두막도 짓고, 그렇게 알콩달콩, 오손도손 그 안에서 살고지고.
"모든 페이지는 빛이 깃들어 있다. 그 주변으로 울타리를 지어 그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