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을 하면 새로운 일상이 펼쳐진다. 숨가쁜 업무의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부터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갖고야 말겠다는 일념이라도 있는 듯이. 때로는 녹화해 둔 방송이 있으면 녹화본을 본 다음에 가볍게 차를 마시고 책을 본다든지 영화를 본다. 그것도 아닌 날은 기타연습을 하거나 가볍게 어학공부를 하거나, 관심사 영상을 시청한다든지. 머리가 복잡한 날은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켜두고 <세상의 모든 음악> 재방송이 끝나는 새벽 3시까지 음악을 듣거나.
요즘은 책과 드라마를 통한 어학공부와 다이어리 쓰기 루틴으로 가고 있다. 책은 보통 종이책 한 권과 전자책 한 권을 동시에 읽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은 종이책으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전자책으로는 김승호의 <돈의 속성>을 읽고 있다. 드라마 때문에 진도를 못나가고 있긴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읽고 있으니 결국 끝을 보겠거니 한다. 바람이 있다면 1월 내로 다 읽었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주말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중국어 공부를 한 후에 듣기와 발음 때문에 중국 드라마를 몇 년 전부터 보고 있는데 그 계기로 중국 드라마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엄마도 좋아하실 것 같아 중드의 세계로 모신 지 일 년 정도 되었는데 얼마 전에 엄마가 내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시며 95부작 <삼국지>를 추천하셨다. 꼭 봤으면 좋겠다고 하신 이유도 있지만 <삼국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95부작이라는 큰 난관이 있음에도 흔쾌히 알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고보니 어릴 때 집에 이문열의 <삼국지> 전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관심을 가지고 찾았을 땐 아버지가 이미 치우신 뒤였다.
오늘은 11화, 40분 분량이니 욕심내지 말고 하루에 한 편에서 두 편 정도만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진도가 술술이다. 조숭이 아들 조조를 만나러 가는 길에 서주 도겸의 아랫사람의 욕심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연주의 조조는 아직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버지 사건을 빌미로 서주를 차지하려고 하는 야욕을 보인다. 도겸은 다른 주군들과 달리 선황에 의해 특별히 추대된 주군이며, 인의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주군으로 백성의 충성과 신뢰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도겸이 기주 원소와 남양 원술 그리고 공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몇 십만 군사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그 요청을 거절한다.
그런데, 유비... 이 글을 쓰게 만든 오늘의 주인공 유비는 요청을 받기도 전에 조조의 5만 군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2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주에 쳐들어온 조조 군대와 맞붙는다. 도겸조차 유비가 도우러 올 것을 몰랐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항복만은 할 수가 없어 모든 걸 내려놓고 자포자기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꼭 계란이라는 법이 없고, 조조가 꼭 바위라는 법도 없지." 멋진 유비의 말. 인의로 백성을 다스리는 서주의 주군 도겸을 돕는 것은 마땅하고, 황실의 후손인 유비로서는 선황이 추대한 도겸을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유비가 서주를 도운 이유였다. 공손에게서 빌려 온 장수 조자룡, 그리고 두 아우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 군대와 맞서고 결국 조조는 퇴각하고 만다. 도겸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힘써 도우러 온 유비 현덕을 칭송하며 자신은 늙고 병들었으니 서주의 50만 백성을 유비에게 맡아달라고 한다. 하지만 유비는 안 될 일이라며 끝까지 사양한다.
도겸의 부하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빌미로 서주를 차지하려고 했던 조조는 보기좋게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그저 도와야 하는 이유만을 붙들고 달려와 싸워 결국 조조를 물러가게 했던 유비에게는 절로 서주의 새로운 주군 자리가 선물로 주어지려 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결과다.
오늘 일터에서 몇 주간 고민과 집중 속에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끝이 보여서 너무 기뻤던 하루였는데 그런 중에 一念通巖(일념통암)을 떠올리며 함께 힘쓴 부서장들에게도 고마웠던 날이었다. 유비의 모습을 보며 내가 닮고 싶은 리더의 면모를 보았다. 엄마가 왜 꼭 보라고 하셨는지도 알 것 같고, 그래서 더 감사하고.
내가 늘 맘에 담고 있는 "진실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떠올린다. 어떤 일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내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 간다면 좋은 결과는 선물처럼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오늘도 깨닫는다. 유비가 "정의와 대의는 영원하다." 이야기한 것을 나도 맘에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