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알베르 카뮈 지음, 오영민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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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 삶이 고생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시작이라면 "모든 생의 끝이 죽음으로 정해져 있다면 애써 살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라는 나의 우울함의 바닥에 깔려있는 문제도 저 시작 문장 속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까? 카뮈는 그 문제를 판단하고 답하는데 시간을 썼고, 나는 묻는 것에서 더 나아갈 생각조차, 의지조차 가지지 않는 쉬운길을 택하여 그냥 기분과 감정에 맡기고 살아왔다.

이 책을 읽으며 유일하게 얻은 위안이란, 20대때, 그저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어서 꾸역꾸역, 이해도 안되면서 읽었던 때에 비해, 수십년 지난 지금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더라는 것이랄까. 심지어 마음에 꾸욱 들어와 박히는 대목도 있고, 쾅 하고 부딪혀 오는 대목도 있었으니, 난 그냥 나이만 먹진 않았나보다 하는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최소한 어떤 책들은 한번 읽기에서 끝나면 안될 것 같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읽을 때 책 속에서 놓친 내용은 물론이고 자기자신에 대한 재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책만 읽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점이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음악도 틀어놓지 않았고, 쪼가리 시간에 틈틈히 읽지도 않았다. 연필로 밑줄 긋는 곳이 많다 보니 자까지 대동하여 진지하게.

어차피 이르게 되는 곳이 죽음이라면 애써 살아야 할 가치는 무엇이냐는 나의 우울함의 시작이라고 쓴 이 문제는 나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 역시 어디 한두군데서 들어보았는가. 하지만 어떤 답도 어떤 결론도 답 같지 않고 결론 같지 않았었다.

계속 굴러내리는 바윗돌, 계속 올려다놓아야 하는 벌. 이 벌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 카뮈의 대답이 아니었다. 올려놓은 바윗돌이 다시 굴러내리고, 그것을 산꼭대기로 다시 밀어올리기 시작하기 전 그 막간에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그의 행위에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 생각없이 바위를 산으로 밀어올리기를 반복하는 대신, 그 잠깐의 순간에 이 끔찍한 형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형벌을 내린 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일까 통찰은 하는 한 그는 약하지 않으며 그의 삶은 의미없지 않다.

시시포스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까닭은 바로 이 되돌아 내려가는 순간, 이 잠깐의 휴지(休止)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을 향해 다시 걸어 내려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가쁜 숨을 고르는 이 시간, 그의 불행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이 접어 들어가는 매순간,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자신의 바위보다도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이 의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리라. 만일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하리라는 희망이 그를 떠 받치고 있다면, 실상 그에게 고통이랄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운명이란 오직 의식하게 되는 그 흔치 않은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시시포스 그에게 고뇌를 가져다주었을 통찰이, 같은 순간, 그의 승리를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멸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04, 205)

 

외부에서 보면 굴러떨어진 바위를 산꼭대기로 다시 밀어올리기를 반복하는 행위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시시포스에게 그 일은 때로는 고통 속에서, 때로는 통찰과 깨달음 속에서 이뤼진다. 바위를 밀어올리는 행위는 그가 타고난 운명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의 비극은 시작되고, 이전의 일상적인 인간에서 부조리의 인간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이 부조리한 인간은 불만과 고통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신성화시키며 인간의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한 어떤 신을 내몰고, 운명 그 자체를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할, 인간사의 한 문제로 받아들인다 (카뮈는 "되돌려놓는다"라는 말을 썼다 206쪽).

 

살아야할 가치를, 이 고통스런 형벌이 언제까지 계속 될것인가를 생각하며 구하는 대신, 이 고통은 운명이라고 인식하고 이 운명에 대해 통찰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러는 한 인간은 바위보다 강하고 운명에 굴복이 아니라 맞대면 하는 것이라고 한 카뮈는 천재 아닌가?

 

죽음이 끝이라면 계속 고생하며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나의 물음에 대한 답에 대한 실마리를 어쩌면 이 책에서 찾았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 한 귀퉁 막혔던 것이 뚫리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기쁨도 잠시 잠깐, 또다시 밀고 들어오는 의문.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못하고 희망의 삶을 사는 인간과, 운명을 의식하고 비극적인 삶을 사는 인간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어느 쪽이 더 낫다한들 선택할 수는 있는가?

 

이 책은 이렇게 두번 읽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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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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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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