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았던 시간에 - 김소연 여행산문집
김소연 지음 / 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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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김소연의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산문집'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여행을 기록할 때 우리는 보통 시간순으로 혹은 지역별로, 다녀온 곳을 쭉 나열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 여행지에 대한 정보 등을 기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김소연 시인의 이 책은 분명 여행 때문에 만들어진 책이긴 하지만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그곳에 가면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체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런 여행책을 읽고 싶어 찾고 있던 참이었다. 

'역시 시인이 쓰면 뭘 써도 달라.'

하루 만에 단숨에 다 읽으며 아쉬워했다. 좀 더 페이지가 남아있었으면.

'찻물을 끓이는 데에 한나절을 보냈다' 같은 글의 소제목에 비하면 '그 좋았던 시간에' 라는 책 제목은 너무 평범하다. 


나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별 짓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기꺼이 나아간다. 낯설어져서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엽서를 사러 나간다. (35쪽,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 중에서)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한치도 다름없이 똑같을 때, 그래서 내일의 나도 역시 그대로 재현될 것이 뻔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안정이라 부르는 대신 무료함, 지루함, 공허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럴땐 나를 낯선 환경에 놓아보는 적극적인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 안정을 깨어보는 댓가, 낯설어져 보는 용기를 택한 댓가로 우리는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서 확인까지 받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행의 진짜 목적은 그런데 있다고 생각한다. 


일행이 있었기 때문에 불상사가 저절로 차단될 수 있었던 것은 불필요한 우연들이 곳곳에 포진된 혼자만의 여행보다 분명 나은 점이었다. (173쪽, '잠든 친구의 얼굴' 중에서)

같은 곳을 가더라도 혼자 하는 여행과 동행이 있는 여행은 각각 다른 여행으로 카운트해야 한다고, 그만큼 다른 경험이고 다른 느낌을 준다고 나는 말해오곤 했다. 그리고 솔직히 혼자 하는 여행을 조금 더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동행이 있는 여행이 주는 미덕도 있음을 얼마전 그룹 여행을 다녀오면서 체험했는데 그것을 시인은 위와 같이 표현했다.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어딘가 편하지 않은 느낌을 받아오던 어느 날 문득 잠들어있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든 느낌을 적은 글이다. 


즐거웠지만, 나는 이상했다.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건조해져갔다. 거울을 보면 슬픔도 근심도 말끔히 사라져,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라던 것이었으나, 바라던 게 아닌 것만 같았다. 안온하되 허전한 상태. 그 허전이 난감한 상태. 나는 소파에 심드렁하게 누워 바다를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토록 바라던 한가함을 얻었고 이토록 태평한데, 왜 헛헛해하는지에 골똘하다가 그만 불안해져버렸다. 한 톨의 슬픔조차 남지 않아 공허했고 그게 불편했다. (216쪽, '바캉스적 인간' 중에서)

한 톨의 슬픔마저 없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허전하고 공허하다는 것.


시인은 여행 그 자체의 의미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느냐에서 나아가 위에 인용했듯이 낯설게 하여 새로와지기, 살아있음을 확인하기에 여행의 궁극적 목적을 두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다음 인용한 시에서도 시인의 그런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다.


목적지보다는

목적지에 가다가 만난

시골 마을이 더 좋았다.


시골 마을 보다는 

시골 마을의 사람 없는 골목이 더 좋았다.


(...)


목적보다는

목적한 적 없는 것들이 언제나 좋았다. (120쪽, '시골 마을' 중에서)


분명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배경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닌 듯 보이는, 시인이 직접 찍어올린 사진들은, 글에 더하여 덤으로 좋았다고 하면 미안할 정도로 매우 좋았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여행기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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