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주름들 - 감각을 일깨우는 시인의 예술 읽기
나희덕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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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보는 순간 '예술의 주름들'이라는 제목이 얼른 와닿지 않았다. 요즘 같이 제목이 중요한 시대에, 책에 난해한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 읽기를 망설이게 했지만 저자는 알다시피 이미 어느 대열에 이른 시인 중 한 사람 아닌가. 이런 시인이 다른 분야의 예술을 어떻게 볼까, 보통 사람들과 어떤 다른 눈을 가지고 해석을 할까 궁금해져서 읽어보아야 겠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겉으로 단번에 드러나는 평면과 달리 주름은 만들어지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주목하는 자에게만 중요하다. 주름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연과 경험이 들어가있을 것 같다.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거느리고 있는가.

우리 몸과 영혼에도 얼마나 많은 주름과 상처가 있는가

"세계와 영혼의 주름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틀림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처럼

세계와 영혼의 주름들을 해독하려 애를 쓰며 몇 개의 겹눈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8쪽, 책머리에)


5부로 나누어 1부에는 자연, 2부에는 여성주의적 정체성 찾기, 3부에는 예술가적 자의식, 4부에는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 5부에는 시와 다른 예쑬의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술 장르로는 영화, 설치 미술, 설치 음악, 행위 예술, 사진, 회화, 조각 등, 저자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이 많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들보다는 처음 보는 실험적, 선진적 작품들이 주로 소개되어있으니, 단순한 예술작품 소개서 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전기에너지가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로 변환을 할수 있듯이 소리가 시로, 영상으로 변환되어 재탄성하여 전혀 새로운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시도 한다. 있는 소리들을 배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 발견하거나 만들어낸 소리로 기존의 예술 장르를 표현하기도 한다. (류이치 사카모토) 에릭 사티는 '가구 음악'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피아노 건반 위에 내리는 햇빛까지도 어떤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접수가 되려면 예술가는 거의 신과 접신이라도 해야하는 경지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 

로드킬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서 나아가 그 야생동물들의 눈에 비친 인간들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황윤. 그는 야생동물의 입을 빌려 영화를 만들었다.

한 사람의 모습만 캔버스에 담고 있는 정영창, 여기 실린 예술가들중 그나마 익숙한 이름 마리 로랑생은 시인 아뽈리네르의 연인이었고 그녀 역시 시를 쓰기도 하여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는 것은 예전에 마리 로랑생 전시회에서 도슨트로부터 들었던 것 같다. 

순간이 멈춘 것 같은 사진 한장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속에 얼마나 깊은 주름을 지니고 있는가. 사진의 '전시적 가치'만 알고 있다가 사진이 가지고 있는 '제의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저자의 설명에 의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쉽게도 현대 사회로 오면서 사진의 제의적 가치는 점차 전시적 가치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는 말도 요즘 처럼 보여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사회를 생각하자 쉽게 이해가 되었다. 이 제의 가치가 최후의 보루로 물러서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라면서 한설희 작가의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소개하였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고독은 그의 음악에 얼마나 깊은 주름을 만들어 들려주고 있는가.

이따금 우울하거나 외롭다고 느낄 때 내가 혼자 찾아가던 뮤직바가 있었다. 밤 9시에 문을 여는 그곳에는 거의 벽면 전체를 채울 정도의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좋아하는 영화의 OST나 콘서트 영상을 신청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매번 무슨 의례를 치르듯 글렌 굴드의 연주 영상을 주인에게 부탁했다. 어두운 바에 혼자 앉아 글렌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 내 고독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60쪽)

글렌 굴드의 웅얼거림의 배경엔 그만의 고독,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깊은 고독이 있었다. 그것을 읽어낸 저자, 우울하거나 외롭다고 느낄때 그녀가 교감하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로 그녀가 고독을 위로받는 방식이 왜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지. 

고작해야 <샘>이라는 변기 설치 작품밖에 모르던 마르셀 뒤샹은 정말 기인이었다. 체스 선수로 20년동안 활동하기도 하였고 오늘날 아바타 처럼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호기심도 지대하여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고 조립하는데 열을 올리기도 한 그를 두고 시인 앙드레 브트통은 '위대한 교란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교란을 통해 새로 탄생하는 세계. 현대 미술의 한 특징이라고 해도 될까. 음악을 가장 비물질적 예술이라고 하면서 음악의 음색처럼 색채도 말로 표현된 것보다 더 미묘한 영혼의 진동을 깨우쳐줄수 있었다고 믿고 회화의 화성학적 미래를 구축한 칸딘스키의 추상에서도 보여지듯이 말이다.

영화 <패터슨>은 여기까지 읽어오면서 자칫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쉬운 마음을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아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계속된다. 일상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태반이라고 할 수 있다. (233쪽)

폴 클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장민숙 화가의, 네모난 집과 창문이 캔버스를 빈 공간 없이 꽉 채우고 있는 <산책>이라는 이름의 그림. 거기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친숙함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다. 시인은 이 작품들중 하나를 사다가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숨겨진 주름을 찾는 행위. 그것이 우리가 시를 읽는 방법이고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었다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그 주름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목되고 발견되진 않는다. 나에게 그와 같은 위상을 가진 비슷한 주름이 이미 내재되어 있을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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