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0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긍정적이라는 것과 낙관적이라는 것을 그동안 구별없이 사용해왔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볼테르는<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낙관주의를 아주 천재적으로 비꼬고 있다.

순진한 소년 캉디드는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팡글로스를 스승으로 모시며 아름다운 툰더 텐 크론크 성에서 살고 있다. 성의 주인인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 남작의 눈에 발각되자 캉디드는 지상 낙원 같은 남작의 성에서 쫓겨나고 갈곳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불가리아 병사들에게 붙잡힌다. 이후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파라과이, 엘도라도, 베네치아, 영국, 콘스탄티노플 등을 거치며 추위와 배고픔, 폭력, 자연재해의 위기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겨가는 가운데 오로지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랑하는 퀴네공드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스승 팡글로스에게 배운 진리, 즉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현재 어떤 어려움과 부당함이 있어보이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결과는 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던 캉디드. 그는 생사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다른 생각을 주장하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면서 그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존재하는가?'

 

 "재미 삼아 배에 탄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하라고 해보세요. 가끔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않는 사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를 바다에 거꾸로 처넣어도 좋아요." (98쪽, 노파의 이야기)

 

나중에 팡글로스를 만나 캉디드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오, 팡글로스! 이런 끔찍한 일을 당신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결국 나는 당신이 말씀하셨던 낙관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군요." (135쪽)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인 카캄보가 낙관주의가 뭐냐고 묻자 캉디드는 대답한다.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135쪽)

 

프랑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볼테르. 그의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이다.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절이었고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허용되던 시대였으나 그는 독설과 비판을 서슴치 않아 불경죄로 감옥살이를 겪었고 영국으로 추방되기까지 한다. 이후로 이 책 속의 캉디드가 그랬듯이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았던 그는 84세때 파리에서 사망하기 까지 다양한 종류의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나는 행동하기 위해 쓴다."는 볼테르의 계몽주의 사상,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 여정 끝에 그들이 찾아낸 정원 (jardin)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캉디드, 팡글로스, 마르틴. 팡글로스는 털어놓는다. 끔찍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강변해왔기 때문에 계속 그것을 주장하긴 했어도 사실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고. 철학자 마르틴은 인간은 불안의 격동 속에 살거나 권태의 혼수상태 속에서 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결론 지었으며, 캉디드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고 팡글로스나 마르틴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못했다.

결말에서 캉디드는 고견을 듣기 위해이슬람교 수도승을 만나러 가지만 그는 그저 침묵을 지키라는 말만 해준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노인을 만나고 그 노인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가꾸는 정원의 과일을 내다파는 것으로 만족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노동을 하면 우리는 세가지 악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 세 가지 악이란 바로 권태, 방탕, 궁핍이라오." (204쪽)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메모하거나 밑줄 긋지 않았을까? 우리가 오늘도 하기 싫어하면서도 일터로 향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막상 노동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 자유로움을 그리 오래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이유이다.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하자, 그것이 인생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라는 마르틴의 말에 캉디드와 팡글로스 모두 동의한다.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 라는 마지막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신의 정원이 아닌 우리의 정원이고 그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앞의 정원을 내 손으로 가꾸는, 사소해보이는 일상의 의무를 잘 수행해내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바랄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와 함께 실린 <미크로메가스>도 분량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보다 짧다고 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다. 볼테르가 살던 1700년대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다는게 우선 놀랍다. 인간이 결코 눈으로 볼 수 없고 인식할 수도 없을, 비교도 안될 크기의 생명체가 있고, 그 생명체가 미물로 보일만한 더 큰 거인이 있다는 상상. 여기서 그 거인들은 지구를 지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눈곱만한 개미집'. 그들이 지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대,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 허락되던 시대에 볼테르는 이런 상상을 하며 나와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 오류를 비웃어 주고 있다.

<미크로메가스>마지막에서 사물의 궁극을 보게 될 거라고 하며 건네준 책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문장에 나와있다.

 

풍자와 비유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그 의미를 다 파악하며 읽는 경우도 있겠지만  책 뒤의 해설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다른 출판사 책은 살펴보질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문학동네 역자 해설은 이 책의 읽기를 완성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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